역사

[스크랩] 삼일절 귀한자료

깜비깜비 2011. 3. 8. 02:48

      

 

 

                                  ♬♬♬ 삼일절 노래 ♬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같은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은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하 이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날을 길이 빛내자


                                  작사,작곡- 정인보, 박태현

 

 

                                                               

 

3.1절을 기리며...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나라를 위해 고귀한 목숨을 바친
유관순 열사의 얼을 기리며 고개 숙여
묵념을 드립니다.
 
그날에 부르던 만세 소리가
귀에 들려 오는 듯
우리에겐 영원한 "유관순 누나"
입니다.
 
 

 
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유언을 우리는 잊을수가 없답니다.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코와 귀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 열사의 생가)

전 이 글을 보면서 많은 걸 느끼고
반성의 시간을 갖게 되었답니다.
 
지금 이 나라는 어찌 변하여 가고 있는지...
그와 같은 독립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동안 
힘들다 생각하면서 살아온 제 자신..
자그마한 일에도 힘들어하고 약하다고만 
투정 부렷던 제 자신을 돌아보며
행복한 투정이라 여기고
나 자신이 먼저가 아닌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렵니다.

 

3*1독립선언서 전문

己未 獨立 宣言書(기미독립선언서)

宣 言 書( 선 언 서 )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 언)하노라. 此(차)로써 世界萬邦(세계만방)에 告(고)하야 人類平等(인류평등)의 大義(대의)를 克明(극명)하며, 此(차)로써 子孫萬代(자손만대)에 誥(고)하야 民族自存(민족자존)의 正權(정권)을 永有(영유)케 하노라.

 半萬年(반 만년) 歷史(역사)의 權威(권위)를 仗(장)하야 此(차)를 宣言(선언)함이며, 二千萬(이천만) 民衆(민중) 의 誠忠(성충)을 合(합)하야 此(차)를 佈明(포명)함이며, 民族(민족)의 恒久如一(항구여일)한 自由發展(자유발 전)을 爲(위)하야 此(차)를 主張(주장)함이며, 人類的(인류적) 良心(양심)의 發露(발로)에 基因(기인)한 世界改造(세계개조)의 大機運(대기운)에 順應幷進(순응병진)하기 爲(위)하야 此(차)를 提起(제기)함이니, 是(시)ㅣ 天 (천)의 明命(명명)이며, 時代(시대)의 大勢(대세)ㅣ며, 全人類(전인류) 共存同生權(공존동생권)의 正當(정당)한 發動(발동)이라, 天下何物(천하하물)이던지 此(차)를 沮止抑制(저지억제)치 못할지니라.

 舊時代(구시대)의 遺物(유물)인 侵略主義(침략주의), 强權主義(강권주의)의 犧牲(희생)을 作(작)하야 有史以來 (유사이래) 累千年(누천년)에 처음으로 異民族(이민족) 箝制(겸제)의 痛苦(통고)를 嘗(상)한 지 今(금)에 十年 (십 년)을 過(과)한지라. 我(아) 生存權(생존권)의 剝喪(박상)됨이 무릇 幾何(기하)ㅣ며, 心靈上(심령상) 發展(발 전)의 障碍(장애)됨이 무릇 幾何(기하)ㅣ며, 民族的(민족적) 尊榮(존영)의 毁損(훼손)됨이 무릇 幾何(기하)ㅣ 며, 新銳(신예)와 獨創(독창)으로써 世界文化(세계문화)의 大潮流(대조류)에 寄與補裨(기여보비)할 機緣(기연) 을 遺失(유실)함이 무릇 幾何(기하)ㅣ뇨.

 噫(희)라, 舊來(구래)의 抑鬱(억울)을 宣暢(선창)하려 하면, 時下(시하)의 苦痛(고통)을 擺脫(파탈)하려 하면, 將來(장래)의 脅威(협위)를 芟除(삼제)하려 하면, 民族的(민족적) 良心(양심)과 國家的(국가적) 廉義(염의)의 壓縮銷殘(압축 소잔)을 興奮伸張(흥분 신장)하려 하면, 各個(각개) 人格(인격)의 正當(정당)한 發達(발달)을 遂(수) 하려 하면, 可憐(가련)한 子弟(자제)에게 苦恥的(고치적) 財産(재산)을 遺與(유여)치 안이하려 하면, 子子孫孫 (자자손손)의 永久完全(영구 완전)한 慶福(경복)을 導迎(도영)하려 하면, 最大急務(최대 급무)가 民族的(민족 적) 獨立(독립)을 確實(확실)케 함이니,二千萬(이천만) 各個(각개)가 人(인)마다 方寸(방촌)의 刃(인)을 懷(회) 하고, 人類通性(인류 통성)과 時代良心(시대 양심)이 正義(정의)의 軍(군)과 人道(인도)의 干戈(간과)로써 護援 (호원)하는 今日(금일), 吾人(오인)은 進(진)하야 取(취)하매 何强(하강)을 挫(좌)치 못하랴. 退(퇴)하야 作(작) 하매 何志(하지)를 展(전)치 못하랴.

 丙子修好條規(병자수호조규) 以來(이래) 時時種種(시시종종)의 金石盟約(금석 맹약)을 食(식)하얏다 하야 日本 (일본)의 無信(무신)을 罪(죄)하려 안이 하노라. 學者(학자)는 講壇(강단)에서, 政治家(정치가)는 實際(실제)에 서,我(아) 世宗世業(세종세업)을 植民地視(식민지시)하고, 我(아) 文化民族(문화민족)을 土昧人遇(토매인우)하 야, 한갓 征服者(정복자)의 快(쾌)를 貪(탐)할 뿐이오, 我(아)의 久遠(구원)한 社會基礎(사회기초)와 卓 (탁락) 한 民族心理(민족 심리)를 無視(무시)한다 하야 日本(일본)의 少義(소의)함을 責(책)하려 안이 하노라. 自己(자 기)를 策勵(책려)하기에 急(급)한 吾人(오인)은 他(타)의 怨尤(원우)를 暇(가)치 못하노라. 現在(현재)를 綢繆(주 무) 하기에 急(급)한 吾人(오인)은 宿昔(숙석)의 懲辨(징변)을 暇(가)치 못하노라.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所任 (소임)은 다만 自己(자기)의 建設(건설)이 有(유)할 뿐이오, 決(결)코 他(타)의 破壞(파괴)에 在(재)치 안이하도 다. 嚴肅(엄숙)한 良心(양심)의 命令(명령)으로써 自家(자가)의 新運命(신운명)을 開拓(개척)함이오, 決(결)코 舊怨(구원)과 一時的(일시적) 感情(감정)으로써 他(타)를 嫉逐排斥(질축 배척)함이 안이로다. 舊思想(구사상), 舊勢力(구세력)에 羈 (기미)된 日本(일본) 爲政家( 위정가)의 功名的(공명적) 犧牲(희생)이 된 不自然(부자 연), 又(우) 不合理(불합리)한 錯誤狀態(착오상태)를 改善匡正(개선 광정)하야, 自然(자연), 又(우) 合理(합리) 한 正經大原(정경대원)으로 歸還(귀환)케 함이로다. 當初(당초)에 民族的(민족적) 要求(요구)로서 出(출)치 안이 한 兩國倂合(양국 병합)의 結果(결과)가, 畢竟(필경) 姑息的(고식적) 威壓(위압)과 差別的(차별적) 不平(불평) 과 統計數字上(통계 숫자상) 虛飾(허식)의 下(하)에서 利害相反(이해상반)한 兩(양) 民族間(민족간)에 永遠(영 원)히 和同(화동)할 수 업는 怨溝(원구)를 去益深造(거익 심조)하는 今來實績(금래 실적)을 觀(관)하라. 勇明果敢(용명과감)으로써 舊誤(구오)를 廓正(확정)하고, 眞正(진정)한 理解(이해)와 同情(동정)에 基本(기본)한 友好的(우호적) 新局面(신국면)을 打開(타개)함이 彼此間(피차간) 遠禍召福(원화 소복)하는 捷徑(첩경)임을 明知(명 지)할 것 안인가. 또, 二千萬(이천만) 含憤蓄怨(함분 축원)의 民(민)을 威力(위력)으로써 拘束(구속)함은 다만 東洋(동양)의 永久(영구)한 平和(평화)를 保障(보장) 所以(소이)가 안일 뿐 안이라, 此(차)로 因(인)하야 東洋安危 (동양 안위)의 主軸(주축)인 四億萬(사억만) 支那人(지나인)의 日本(일본)에 對(대)한 危懼(위구)와 猜疑(시의) 를 갈스록 濃厚(농후)케 하야, 그 結果(결과)로 東洋(동양) 全局(전국)이 共倒同亡(공도 동망)의 悲運(비운)을 招致(초치)할 것이 明(명)하니,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朝鮮獨立(조선 독립)은 朝鮮人(조선인)으로 하여금 正當 (정당)한 生榮(생영)을 遂(수)케 하는 同時(동시)에, 日本(일본)으로 하여금 邪路(사로)로서 出(출)하야 東洋(동 양) 支持者(지지자)인 重責(중책)을 全(전)케 하는 것이며, 支那(지나)로 하야금 夢寐(몽매)에도 免(면)하지 못 하는 不安(불안), 恐怖(공포)로서 脫出(탈출)케 하는 것이며, 또 東洋平和(동양 평화)로 重要(중요)한 一部(일부) 를 삼는 世界平和(세계 평화), 人類幸福(인류 행복)에 必要(필요)한 階段(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엇지 區區(구구)한 感情上(감정상) 問題(문제)ㅣ리오.

 아아, 新天地(신천지)가 眼前(안전)에 展開(전개)되도다. 威力(위력)의 時代(시대)가 去(거)하고 道義(도의)의 時代(시대)가 來(내)하도다. 過去(과거) 全世紀(전세기)에 鍊磨長養(연마 장양)된 人道的(인도적) 精神(정신)이 바야흐로 新文明(신문명)의 曙光(서광)을 人類(인류)의 歷史(역사)에 投射(투사)하기 始(시)하도다. 新春(신춘) 이 世界(세계)에 來(내)하야 萬物(만물)의 回蘇(회소)를 催促(최촉)하는도다. 凍氷寒雪(동빙한설)에 呼吸(호흡) 을 閉蟄(폐칩)한 것이 彼一時(피 일시)의 勢(세)ㅣ라 하면 和風暖陽(화풍 난양)에 氣脈(기맥)을 振舒(진서)함은 此一時(차 일시)의 勢(세)ㅣ니, 天地(천지)의 復運(복운)에 際(제)하고 世界(세계)의 變潮(변조)를 乘(승)한 吾人 (오인)은 아모 躊躇(주저)할 것 업스며, 아모 忌憚(기탄)할 것 업도다.我(아)의 固有(고유)한 自由權(자유권)을 護全(호전)하야 生旺(생왕)의 樂(낙)을 飽享(포향)할 것이며, 我(아)의 自足(자족)한 獨創力(독창력)을 發揮(발 휘)하야 春滿(춘만)한 大界(대계)에 民族的(민족적) 精華(정화)를 結紐(결뉴)할지로다.

 吾等(오등)이 玆(자)에 奮起(분기)하도다. 良心(양심)이 我(아)와 同存(동존)하며 眞理(진리)가 我(아)와 幷進 (병진)하는도다. 男女老少(남녀노소) 업시 陰鬱(음울)한 古巢(고소)로서 活潑(활발)히 起來(기래)하야 萬彙군象 (만휘 군상)으로 더부러 欣快(흔쾌)한 復活(부활)을 成遂(성수)하게 되도다. 千百世(천 백세) 祖靈(조령)이 吾等 (오등)을 陰佑(음우)하며 全世界(전세계) 氣運(기운)이 吾等(오등)을 外護(외호)하나니,着手(착수)가 곳 成功(성 공)이라. 다만, 前頭(전두)의 光明(광명)으로 驀進(맥진)할 따름인뎌.

公約三章(공약 삼 장)

ㅡ.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此擧(차거)는 正義(정의), 人道(인도),生存(생존),尊榮(존영)을 爲(위)하는 民族的 (민족적) 要求(요구)ㅣ니, 오즉 自由的(자유적) 精神(정신)을 發揮(발휘)할 것이오, 決(결)코 排他的(배타적) 感情(감정)으로 逸走(일주)하지 말라.

ㅡ. 最後(최후)의 一人(일인)까지, 最後(최후)의 一刻(일각)까지 民族(민족)의 正當(정당)한 意思(의사)를 快(쾌) 히 發表(발표)하라.

ㅡ. 一切(일체)의 行動(행동)은 가장 秩序(질서)를 尊重(존중)하야, 吾人(오인)의 主張(주장)과 態度(태도)로 하 야금 어대까지던지 光明正大(광명정대)하게 하라.

朝鮮建國 4252년 3월 1일

朝鮮民族代表

 

 

                            금년 3,1이 3,1절 92주년이 된답니다

     혹시 독립만세운동인 3·1운동을 이끈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을 아시는지요?

                    손병희 길선주 이필주 백용성 김완규 김병조 김창준
                    권동진 권병덕 나용환 나인협 양전백 양한묵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승훈 이종훈 이종일 임예환 박준승
                    박희도 박동완 신홍식 신석구 오세창 오화영 정춘수
                    최성모 최 린 한용운 홍병기 홍기조

 

     1919년 민족 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고,

    탑골 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이 독립 선언서 낭독 후 독립 만세

    시위운동 전개를 하여 이 두 운동으로 인해 3.1운동은 전국 방방

      곡곡과 해외로 확산 되었답니다.

   허나 일본의 경찰과 군대는 총검으로 운동을 처참하게 탄압을 하였고

   그 예로 유관순의 순국과 화성 제암리 주민 학살 등이 있었습니다.

     제암리 주민 학살이란 1919년 4월 15일 일제 군경은 제암리의

    기독교도 약 30명을 교회에 가두고 집중 사격을 한 후, 교회당에

                   불을 질른 사건입니다.

  또한 인근 교회 건물과 민가에 불을 질러 많은 살상자를 내었습니다.

   3.1운동의 참가 인원은 2,023,098명이나 됬으나 사망자가 7,509명

    부상자가 15,961명 피검자가 46,948명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사망하신 분들과 이제 이세상을 하직하신 모든 분들께

                  삼가 명복을 빕니다....

 

 

 

 

                       ***윤봉길의사 순국 장면 사진 공개***

 

 

 

 
    국내에서 최초로 공개된 매헌 윤봉길(梅軒 尹奉吉·1908∼1932)의사의 처형 장면을 담은 사진은 너무나 놀랍고 충격적이다.
                                   윤 의사의 무릎을 꿇린 채 처형함으로써 일제가 윤 의사의 기개를 꺾으려했던 점,
                              총탄이 너무나도 정확히 윤 의사의 이마를 관통해 오히려 피가 별로 흐르지 않은 점 등이
                                                           사진을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처연하게 만든다.
  지난달 초 일본 방위청 자료실에서 ‘만밀대일기(滿密大日記)’에 실린 이 사진을 발견한 ‘더 채널’의 김광만(金光萬) 대표나 신운용 근현대사 팀장,
                이 사진 사본을 전해 받은 유족이나 윤병석(尹炳奭) 인하대 명예교수의 첫 반응은 한마디로 ‘충격’ 그 자체였다.
                                              (펀주: 아래 사진에서 잔잔한 미소를 띤 윤의사의 표정은
                                                  '내 할일을 하고 가니 기쁘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안위에 두지않는 희생정신과 초연한 모습을 보이는 군요........)
 
                                                    2.안중근 의사가 복역한 중국 여순 형무소
                                     단재 신채호선생과 도마 안중근의사가 복역하였으며 일본과 구소련이 중국을 점령하여
                                      중국과 한국등의 애국지사들을 구금하기도 했던 중국 대련시 여순에 위치한 여순감옥.
                                       당시의 피맺힌 절규를 다시 한번 돌아봄으로써 일본의 제국주의적 잔인성을 다시한번
                                                                     환기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여순형무소는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에 의하면- 외국인에게 개방이 금지
                                         되었다고 한다. 필자가 방문할 당시 중국사람을 대동하여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다.
                                                            <여순 형무소 전경. 중국 대련시 여순소재>
 
                                         <형무소 외부 모습. 각 방마다 창가에 번호가 매겨져있다. 작은 사진은 저장고>
                                           각 방마다 번호가 매겨져 안팎으로 감시할 수 있는 감시체계가 마련되어 있다.
                                         작은 사진은 음식물등을 저장했던 저장고로 굴을 파 냉장고 대용으로 사용하였다. 
 
                                   
                                   <형무소 뒤편 외부 전경. 스산한 분위기마저 드는 이곳에서 과거 순국 선혈들은 산화했으리라>
 
                                     
                                              <수의. 신체검사를 받거나 형무소 입소시 비취되어 있는 수의로 갈아 입게 된다>
                                           여순감옥을 관람할때 처음으로 들르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수의들이 비취되어 있는 이곳.
                                          형을치루기 위해서는 비취된 수의로 갈아 입은 후 신체검사등을 통해 감방에 구금하게 된다.
 
                                                  <형무소 복도 모습. 바닥은 철창으로 아래층을 감시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형무소 내부는 대부분 사진의 모습을 하고 있다. 1층과 2층으로 분리되어 2층 바닥에 철망을
                                                            설치하여 2층에서도 1층의 복도를 감시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형무소 복도 모습. 관람 제한구역은 바리케이트로 막아 놓았다>
 
                                                     <형무소 복도 모습. 각 방별로 복역자 번호의 문패가 보인다.>
                                        형무소 1층의 모습.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음산한 분위기가 방문한 사람으로 하여금
DIV style="MARGIN: 5px 0px" align=left>                                        당시의 잔혹한 실상을 몸소 느끼게 한다. 각 방마다 구금된 복역자번호의 문패가 있어, 감시
                                                                                            하기 편하게 해놓았다.
 
                                            <형무소 복도 모습. 감방 문의 우측 하단에 음식을 넣을 수 있는 입구가 보인다>
                                       각 감방의 방문은 나무재질로 되어있으며, 문의 위쪽은 철망으로 되어 있어 안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되어있다.
                                                      감옥 내에 화장실은 없으며, 나무로 된 양동이가 화장실 역할을 대신 한다.
                                          각 방문 우측하단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이곳은 음식이나 기타 물품을 들이던 구멍이다.
 
                                                                          <복역자들의 인식표와 타고남은 재>
                                           좌측은 복역자들의 신분 확인을 위한 인식표이다. 우측은 복역하던 복역자들을 투항하기
                                       전에 태워버리고 남은 재다. 복역시 사망한 복역자들을 화장하여 처리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감방의 복역자번호 문패>
                                                         각 감방의 좌측상단에 붙혀 있는 복역자들의 번호표이다.
 
                                     
                                                                 <감방 내부의 모습. 짚신과 변기가 놓여 있다>
                                           감방 내부의 모습이다. 내부에는 화장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기때문에 나무로 제작된
                                                                             양동이가 변기 역할을 대신 한다.
 
                                                                          <신채호 선생의 약력과 사진>
 
                                     
                                                                                  <신채호 선생의 조선혁명선언문>
 
                                                    사진은 복역할 당시의 단재 신채호선생과 조선혁명선언서 전문이다.
 
                                               형무소 안 신채호 선생이 투옥돼었던 감옥 앞에 걸려있는 신채호선생의 사진.
                                                              선생의 가슴에 뚜렷한 글씨로 "신채호"라고 적혀있다.
                                                   중국인들도 신채호선생의 역사학자로서의 업적을 추앙하듯 그의 프로필에
                                                                    "저명한 역사학자"라는 글귀로 그를 소개하고 있다.
 
                                                                                 다음은 사진상의 신채호선생 프로필.
 
                                                             신채호선생(1880-1936) 조선 충청남도인, 저명한 역사학자, 문학자
                                                                             1923년 조선혁명선언, 무장 항일 투쟁전개
                                                                                  1928년 5월 대만에서 경찰에 체포됨.
                                                                                        1930년 4월 10년형 선고 받음.
                                                                                   1936년 2월 21일 여순감옥에서 병사.
 
                                                                      <감방에 감금된 사람들의 식기>
                                    당시 감방에서 사용되던 식기이다. 7개의 식기가 보이는데 의미는 복역자의 죄질에 따라 식기의 
                                                        크기를 달리 한 것이다. 1번 식기는 죄질이 가벼운 복역자의 식기이다.
 
                                                                          <감옥을 지키는 교도관의 집무실>
                                          형무소의 내부에 위치한 교도관의 집무실이다. 당시의 생활수준에 비교한다면 전화기와
                                                                        선풍기까지 비취되어 있는 꽤 품격있는 모습이다.
 
                                                                     <암실설명. 암실을 볼 수 있는 작은 구멍>
                                      암실은 특별한 복역자를 엄하게 다스리기 위해 제작되어 있는 독방이다. 감방의 내부는 1평도
                                       되지 않는 좁은 공간이며, 사진은 전시를 위해 불을 켜놓았지만,복역시에는 아무것도보이지
                                         않는 암실이다. 내부와 외부로 통하는 곳은 사진 하단의 테니스공 크기의 작은 구멍뿐이며,
                                                                      이곳 여순형무소에는 4개의 독방이 설치되어있다.
 
                                                   <암실로 들어 가는 작은 문. 암실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
                                           암실로 들어가는 입구. 다소 커보이지만 숙여야 겨우 들어 갈 수 있는 작은 문이다.
 
                                                                                  <암실 독방 내부 모습>
                                           독방의 외부의 테니스공크기의 작은 구멍을 통해 들여다 본 독방 내부의 모습이다.
                                      독방 내부에는 변을 볼 수있는 "변통"과 "밥통", 우측 중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입구가 조그맣
                                     게 눈에 띈다. 복역 중에는 어떠한 불빛도 볼 수 없다. 독방내부의 구조를 보아 당시의 참혹했던 
                                                                                       현실을 엿 볼 수 있다.
 
                                    
                                                                                           <시체실>
                                      사진은 복역중 사망한 시체를 보관하던 시체실이다. 현재 내부는 아무것도 없는 빈방이지만,
                                      당시에는 많은 시체들이 바닥에 뒤엉켜있었을 것이다. 사진 중간에 시체실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작은 창문이 보인다.
 
                                    
                                                                                                <증언>
 
                                     
                                                                                                <고문도구>
 
                                                                                             <고문형틀>
                                               형틀에서 고문을 받고 후유증을 호소하던 중국인이 고문방법을 증언한 사진이다.
                                      호스를 수감자 입에 연결한 다음 몸속으로 집어넣은 후 커다란 몽둥이나 기타 커다란 나무기둥
                                        등을 사용해 배를 짓누르면 눈, 코, 입, 항문을 통해 몸속의 수분이 빠져나온다. 또 한 손톱과
                                                       발톱사이에 날카로운 나무조각을 박아넣는 잔인한 고문도 행해졌다.
 
                                                                                           <고문도구>
                                     다양한 고문도구들이 눈길을 끈다. 발목이나 손목에 걸었던 쇠사슬 고리들이 당시의 복역자의
                                                                       피와 절규를 머금은 채 고스란히 놓여 있다.
 
                                                                       <교도관이 착용하던 모자와 옷>
 
                                                              <의무실과 사용하던 의약품과 화학약품>
 
                                     
                                                                  <의무실에서 사용하던 현미경, 주사 약품>
 
                                                                                           <교수형장 전경>
                                    여순형무소에 있는 교수형장 중의 하나이다. 구소련이 사용하던 교수형장은 형무소 내부에 위치
                                    되어 있다. 우측하단의 작은 사진은 교수형장으로 통하는 길로 교수형을 위해서는 이 길을 거쳐
                                            야 했다. 이 길로 끌려 가며, 조국을 울부짖었을 선혈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선하다. 
 
                                                                                  <교수형장 내부 도르레>
 
                                                                                    <교수형장의 모습>
                                                교수형장 내부의 모습으로 상단은 도르레와 목을 걸기 위한 밧줄 매듭이다.
                                    바닥에는 교수형장에서 볼 수 있는 작은 구멍이 보이며 형을 당하는 복역자는 작은 구멍 속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형장의 하단에는 사람이 들어 갈 수 있는 원통이 보이는데 매달린 시신은
                                       사망 후 통속으로 들어가 매장된다. 형 집행후 사망여부를 확인한다음 사망하지 않았을 경우
                                                                                   에는 독극물을 투여하여 살해한다.
 
                                                                          <교수형으로 살해 된 사람의 모습>
                                        공동묘지에서 발견된 시신의 모습으로 매우 참혹한 모습. 교수형으로 살해된 후 그림과 같은
                                        통에 넣어 매장되었다. 그 이유는 일본군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 한국인과 중국인들로 하여금
                                                                         죽어서까지 무릎 꿇게 하기 위함이었다.
 
                                    
                                                                          <교수형을 받기 위해 대기하던 대기실>
                                        교수형을 받기 위해 대기하던 대기실이다. 불빛조차 없는 독방형 대기실에서 울부짖으며,
                                         조국을 절실히 그리워 한 선혈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들은 이곳에서 형을 기다리며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죄수들이 일하던 인쇄기>
 
                                                                     <교도관이 사용하던 고문도구 채찍등>
 
                                    
                                                                       <죄수 이송시 머리에 씌우던 도구>
 
                                              <안중근의사를 구금했던 방에 대한 설명.조선애국지사 안중근을 구금했던 감방>
                                         안중근(1879-1910)은 조선 황해도 해주부 사람이다. 1907년 조선의병운동에 가담하여 참모
                                          중장을 담당하였으며 1909년 "대한독립동맹" 조직에 참여하였다. 동년 10월 26일 그는 중국
                                       의 하얼빈역에서 일본제국주의 중심인물로 조선 초대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체포된 후 11월 3일 여순감옥으로 압송되었으며 일본의 "국사범"으로 분류되어 간수보장
                                           당직실 옆에 있는 이 감방에 단독으로 구급되었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안중근은
                                                                     감옥 교수형장에서 순국하였으며 그때 나이 32세였다.
 
                                                                                <안중근의사의 친필>
                                        카메라가 부착되어 다소 조화롭지 못한 분위기의 감방 내부. 감방의 내부 벽에는 안중근
                                                                            의사의 친필 두 점이 걸려 있다.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면 애가 끓는다.
 
                                                                             <안중근의사가 사용하던 변기>
 
                                                              <안중근의사가 사용하던 책상과 의자 및 사무도구>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안중근의사의 유품들. 혼이 깃들어있는 사무용품에서 안중근의사의
                                                                            희생정신을 다시한번 상기해본다. 
 
                                                          <좌측 안중근의사를 구금했던 감방. 우측은 교도관이 머물었던 당직실>
                                         안중근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죄로 일본의 주요 국사법으로 분류되어 개별적으로
                                                                            간수보장들의 당직실 옆 독방에 구금되었다.
 
                                                                         <안중근의사가 교수형 당한 장소>
 
                                    
                                                                                <죽은 시체를 버리던 문 I>
                                        일본에 대항하여 교수형에 의해 살해된 시신이 들어있는 통은 사진의 문을 통해 동산묘지로
                                                                                           매장된다.
 
                                                                              <죽은 시체를 버리던 문 II>
 
                                                          <교수형한 시체들을 묻었던 동산 묘지의 실제 모습>
 
                                                                         <실제무덤에서 발견된 사체들>
                                            교수형 후 살해된 시신들을 무더기로 묻었던 장소가 발견되어 충격을 더해주고 있다.
                                                                   이곳은 실제 발견될 당시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안중근의사의 유해도 이곳 어딘가에 안장되어 있을까?
 
                                                           <당시 전쟁시 구소련군에 의해 사용되었던 폭약과 어뢰>
 
 
                                                                          <배에서 사용하던 닻과 자동차>
 
 <발견된 시체와 염산병>
교수형 후 나무통속에서 발견된 시신의 모습으로 사진 하단에는 염산병이 보인다.
죽어서까지 일본에 무릎을 꿇도록 강요하였으며, 무릎이 굽혀지지 않은 시신에는 염산을
뿌려 시신의 관절을 녹인 후 무릎을 꿇도록 한 모습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
 
                                                                            <감옥을 감시하던 감시탑>
 
                                    일본은 과거에 대한 반성으로 화해무드를 조성하고 있는 독일을 거울삼아 하루빨리 제국주의의
                                     망령에서 벗어나 과거를 뉘우치고 반성하여 화해의 관계로 돌아서는 성의를 보여야 할 것이다

 

 

 

 마음껏 외친 ‘대한독립만세’…미 한인들 ‘3·1운동 1돌 기념’희귀 사진

           

 ★...87년 전 미국 한인들이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는 모습이 담긴 희귀 사진이 발견됐다. 사진은 1920년 캘리포니아주 중부 다이뉴바에 살고 있던 150여명의 한인들이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1년째를 맞아, 시가행진을 펼치며 조국의 독립을 기원하던 장면을 담고 있다. 행렬 맨 앞에 사자탈이 보이고 그 뒤로 ‘코리아’라는 팻말과 성조기를 단 차량이 따르고 있다. 이 사진은 서던캘리포니아대학 한국학도서관이 한국 관련 사진을 디지털 복원하는 과정에서 입수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발행되는 <크리스천헤럴드>는 이 사진을 최근 발간된 6권짜리 미주 및 멕시코 이민사에 실어 공개했다.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한겨레



 

美 한인 3.1운동 1주년 희귀 사진 발견


★...87년전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한인들이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는 희귀 사진들이 발견돼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사진은 다이뉴바에서 열린 3.1운동 1주년 기념식에 참가한 한인적십자사 여성회원과 한인 청년들.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사진은 캘리포니아 중부지역 한인적십자사 회원들이 1921년 제2회 기념식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 대형 태극기와 함께 뒤편으로 독립문 모형이 서있다.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사진은 1주년 기념식을 빛낸 어린이 악대. 뒤편으로 다이뉴바의 한인 교회가 서있다.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사진은 다이뉴바의 한인장로교회에 모인 한인들. 3.1운동 기념식이 지난 1920년의 다른 시기에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사진은 기념행사를 마친 한인들이 다이뉴바의 중심가로 나와 행진하고 있는 모습. 행렬의 맨 앞에는 사자탈이 보이고 그 뒤로 ‘KOREA‘라는 팻말을 앞에 달고 성조기와 태극기를 꽂은 차량들이 따르고 있다


★...사진은 3.1운동 1주년을 맞은 1920년 캘리포니아주 중부의 다이뉴바에 있는 한인 장로교회 옆에서 한인들이 모여 성대한 기념식을 가진 모습. 맨 왼쪽에는 흰옷을 입은 한인적십자사 회원들이 대형 태극기를 들고 있고 그 오른쪽에는 성조기와 함께 태극기가 게양됐다

 

 


 

 

 

출처 : 열 린 바 다
글쓴이 : 빨강능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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