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님을 연구하고 공부를 하려다보니까 뜻밖에 천주교 박해사건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 사건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하게 알아 보았습니다.
조선시대의 역사를 공부를 하려니까 이것 저것 어려운 용어가 속출하고, 하나 하나 씩 속의 뜻을 헤쳐보지 않으면 수박 겉홣기씩의 공부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모름지기 공부를 할려면 기초 지식이 쌓여야 하는 모양입니다.
천주교 박해사건은 조선시대 순조임금때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등장하면서 일어납니다.
당시 준탕평책을 내세워 왕권강화를 위하여 노력하였던 정조임금이 돌아가면서, 정조 임금님의 준탕평책을 찬성하였던 '시파' 즉 남인계열의 사람들을 물러내기 위하여, 안동김씨세력 위주의 노론인 '벽파'가 시도하였던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정조임금의 바로 앞 임금은 사도세자로 유명한 영조임금인데, 아시다 시피 영조임금은 당파싸움을 척결하기 위하여 소위 탕평책이란 정책을 하였죠.
벽파는 시파를 물리칠 기회를 보던 중 당시 천주교가 크게 일어나는 것을 계기로, 천주교 신자와 천주교 신자가 일부포함된 시파를 소위 주문모 신부가 천주교인들과 합쳐 역모를 일으켰다는 구실을 삼아서, 천주교 박해 사건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신유사옥'입니다.
이 사건으로 정약용님은 형제인 정약전님과 함께 유배를 가게 됩니다. 정약용님은 처음에는 포항 장기로 그 다음은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유배가서 공부한 곳이 다산초당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형제인 정약종은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신유사옥 [辛酉邪獄]
1801년(순조 1) 조선시대 이단 탄압과 집권층[노론의 벽파]의 권력투쟁에서 비롯된 천주교도와 남인(南人) [시파]세력에 대한 탄압 사건.
신유교난(辛酉敎難)이라고도 한다. 조선 후기에 집권자들은 성리학을 한층 교조적으로 신봉하면서, 그 사회 질서에 위협이 되는 이념을 배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천주교는 하나의 학문에서 신앙으로, 소수의 지식인들로부터 민중 사이로 널리 퍼졌다.
특히 1794년(정조 18) 중국 베이징[北京] 교구에서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조선에 파견한 이후, 약 4,000명이던 신자가 수년 만에 1만 명으로 증가할 정도로 교세가 확장되었다. 당시 남인들은 정치적·이념적으로 노론(老論) 집권세력과 지향점이 달라 갈등이 깊었는데, 그들 중 일부가 천주교를 탐구하고 신앙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많은 공격을 받고 있었다.
한편 영조 말년 이후 정계에서는 노론세력인 벽파(僻派)와 남인세력인 시파(時派) 사이에 대립이 벌어졌다. 그 중심 인물이 모두 노론 계열이었고, 쟁점도 주로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처분 및 그에 대해 정조가 취해야 할 입장에 대한 것이었지만, 시파는 벽파와 달리 정조의 정책[준탕평책]을 따라 천주교와 남인에 대하여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그들 사이의 대립은 천주교에 대한 정부의 정책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00년 순조가 즉위하여 안동김씨인 김구주(金龜株)의 누이인 영조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하면서 벽파가 일시에 정권을 잡았다. 벽파 정권은 먼저 시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벌였으며, 이단의 배격이라는 원론적 입장에서 천주교와 남인에 대해 탄압을 가했다. 1801년 1월 정순왕후는 사학(邪學:천주교)을 엄금하고 뉘우치지 않는 자에게는 반역죄를 적용하며, 전국적으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철저하게 실시해 신자의 씨를 남기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유는 천주교가 혈연과 군신의 관계를 부정하여 인륜을 무너뜨림으로써 백성들을 오랑캐나 금수의 상태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조선시대에 범죄자의 색출과 세금 징수.부역의 동원 따위를 위하여 다섯 민호(민호)를 한 통씩 묶던 호적제도.
최초 한명회에 의해 만들어 졌는데, 조선 중기때에 활성화됨.
성종16년(1485)에 시행하고 숙종 원년(1675)에 오가작통법21조로 더 강화됨
순조(純祖)와 헌종(憲宗)때에는 천주교를 탄압하는 데 이용되었음
http://ko.wikipedia.org/wiki/%EC%98%A4%EA%B0%80%EC%9E%91%ED%86%B5%EB%B2%95 <--위키백과 더 자세히 보기.
그리하여 천주교에 관여했던 남인 인사와 당시 교회를 이끌고 있던 인물들이 대거 체포되어, 그해 2월에 정약종(丁若鍾)·최창현(崔昌顯)·최필공(崔必恭)·홍교만(洪敎萬)·홍낙민(洪樂民)·이승훈(李承薰)이 서소문 밖에서 처형당했다. 권철신(權哲身)·이가환(李家煥)은 옥사했으며, 이존창(李存昌)은 충청도 공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고, 정약전(丁若銓)·정약용(丁若鏞) 형제는 유배당했다. 여주와 양근 감옥에 갇혔던 이중배(李中培)·최필제(崔必悌) 등의 경기지방 천주교도들도 다수 처형당했으며, 황주까지 피신했던 주문모 신부도 자수하여 효수되었다. 가을에는 황사영(黃嗣永)이 탄압의 전말을 보고하고 중국이나 서양의 힘을 동원하여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얻게 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베이징의 교회에 보내려 한 일이 발각되어, 이에 관계된 인물들이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신자 약 100명이 처형되고 400여 명이 유배된 같은 해 12월에 척사윤음(斥邪綸音)이 공표되면서 일단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천주교 박해는 계속되었다.
브리태니커참조.
☞척사윤음(斥邪綸音)은 1839년(헌종5년) 서교 즉 천주교를 배척하기 위하여 국민에게 내린 윤음이다. 태조 이후 역대의 교훈·격언을 모아 사(邪)의 폐독을 지적하고 귀정(歸正)의 길을 가르친 것이다. 검교제학 조인영이 건의한 것으로 한글로 번역하여 대중이 알기 쉽게 하였다.
☞조인영의 벼슬은 검교제학인데, 제학은 종2품벼슬.검교란 임시로 맡기는 관직을 말합니다.
http://100.naver.com/100.nhn?docid=8291 <-- 검교에 대한 뜻 자세하게 보기.
☞ 조선시대 용어(관직, 벼슬등) 잘 알 수 있는 사이트
http://cafe.daum.net/26gjmms/DX9I/9?docid=16uMg|DX9I|9|20070414212242&q=%B0%CB%B1%B3%C1%A6%C7%D0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그림으로 보는 항일투사 윤봉길의 생애 (0) | 2011.09.27 |
---|---|
[스크랩] 윤봉길 의사 의 최후 (0) | 2011.09.27 |
[스크랩] 마지막 황제 영친왕 (0) | 2011.09.14 |
[스크랩] 오늘 아침 서프라이즈 `고려장` (0) | 2011.09.08 |
[스크랩] ★ 조선왕조 가계보 ★ /고종황제 가계도/영친왕 의친왕 가계도 (0) | 2011.0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