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3월 26일 오늘 조선침략의 원흉인 일본총리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한 살인죄로
안중근 義士께서 교수형으로 순국하니 지금부터 정확히 100년전에 일어난 일이다.
1909년 10월 26일 러시아 재무상 코프체프와 회담하기위해 만주 하얼삔 역에 도착하여
러시아헌병대 군악연주로 환영식이 거행되는 순간 안중근은 가지고 있던 육혈포(리볼버권총)
3발을 이토의 심장을 향해 쏘았는데 이로서 이토히로부미는 69세의 일기로 生을 마감하게
되는데 여기까지는 우리가 역사시간에 배운바 있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일본의 조선침략정책의 최고 우두머리인 이토히로부미는 청일전쟁, 을사조약,러일전쟁을
주도하며 그 당시 일본의 입장에서는 최고의 국가적인 영웅이었는데 이름모를 조선의 한 청년
으로부터 저격을 당하니 100년전의 아주 큰 사건인 셈이다.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안중근(兒名:안응칠)은 그당시 저물어 가는 조선말기의 암울한
시기에 일제의 조선침략획책을 세계만방에 알리고자 홀몸으로 항거하여 이토오를 저격한 것이다.
< 안 義士 의 옥중사진>
임진왜란때 이 나라를 구하신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안중근은 내가 존경하는 분중 하나인데
그는 사람을 죽인 암살범이 아니라 전쟁에서 적군 수장을 사살한 군인으로서 임무를 다 한 것으로
믿고 싶은게 나만의 생각만이 아닐 것이다.
일반국민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 있는데 그는 1985년 프랑스인 빌렘 신부로부터 세례(세레명:토마스)를 받은 천주교 신자 였는데 뤼순감옥에 수감중인 안중근을 면회간 빌렘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한다.
<나는 비록 사람을 죽였지만 이나라를 지키고자 전쟁에서 적군의 수장을 사살하였기에 후회는 없소이다>
안중근이 순국한후 일제의 탄압에 의해 천주교 조선교구에서 그를 살인자 라 하여 천주교에서 파문되는데 이후 1985년 교황 요한바오로2세의 한국방문때 한국천주교 주교단에서 안중근의 천주교인 복권을 교황에게 청원하였고 마침내 2000년 안중근은 교적이 회복되게 되었다 한다.
100년전 風前燈火인 이나라 조선을 위해 거사를 일으킨 안중근의 심정 은 어떠했을까?
외롭고 참담한 시절에 나라를 구하고자 이 한몸을 바치고자 어떻게 결 심했을까?
<안중근 옥중친필>
최근 국방부에서 안중근을 <장군>으로 기록하고 육군본부내에 <안중근 장군 기념실>을
열었다 하는데 그의 호칭이 <장군>이던 <의사>이던 별 상관 없으나 개인적으로는 <의사>
호칭이 더 익숙하고 친밀감이 간다.
서울 남산에 안중근 기념관 공사가 한창이라 한다.
충북 청주에 안중근기념관이 있는데 몇 년전 독도수호대 전국모임이 있어 가 보았는데 기념관이라 하기에는 초라하기 짝이 없어 새로 짖고 있는 남산기념관을 기대해 본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체포돼 처형되기까지 4개월여 수용됐던 뤼순감옥의 감방.
이렇게 역사적인 날에
저는 사형선고를 받은 안중근 의사에게 그의 어머니가 보낸 편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떳떳하게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살려고 몸부림하는 인상을 남기지 말고
의연히 목숨을 버리거라.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한국 사람
전체의 분노를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살인자로 제명한 과거 씻고 명동성당 추모미사
살인자로 제명한 과거 씻고 명동성당 추모미사 맞는 기념미사를 봉헌한다. 한국가톨릭의 최고 지도자가 명동대성당에서 교구 차원의 공식적인 안의사 추모 미사를 봉헌하는 것은 100년만에 처음이다. 종부성사 한 신부 징계…뒤이은 총독 암살 계획 일러바쳐 프랑스인 빌렘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았다. 토마스란 세례명을 받은 안중근은 교리 공부를 열심히 총대(성당 사무장)로서 독실하게 교회활동을 했다. 고향을 떠나 해외로 망명해 의병활동을 하던 안중근이 1909년 10월 26일 일제의 최고실력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자 중국의 최고 실력자 원세개는 “5억 중화인이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찬탄했으나 한국 가톨릭의 최고 지도자인 프랑스인 뮈텔 주교(1854~1933)는 일본 검사도 허락한 신부의 면회와 성체성사를 거부했고, 안중근이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도 부인했다. 그런데도 황해도 신천에서 성당에서 함께 지내던 안의사를 찾아가 사형 직전 종부성사를 한 빌렘 신부에 대해 ‘명령 불복종’을 이유로 2개월간 미사 집전을 금하는 성무집행 금지 조처를 내렸다. 3명의 선교사와 함께 참석해 일제 지도자의 서거를 애도했다. 그런데도 안중근의 신앙심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일본인 검사 앞에서 가톨릭신자임을 밝혔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가톨릭에서 죄악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받고 “평화로운 남의 나라를 침략해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자하는데도 수수방관 하는 것은 죄악이 되므로 나는 그 죄악을 제거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장남 분도를 가톨릭 신부로 키워달라고 아내에게 유언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에 가톨릭은 한 명도 없어 식민지 백성의 아픔은 안중에 없었다. 그는 안중근의 사형을 집행한 일본인들이 주검을 가족들에게 넘겨주지않았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그것은 매우 당연하다"고 논평했다. 그는 일제의 침탈을 수수방관하는데서 나아가 제국
일제를 도왔다. 가까운 빌렘신부가 ‘안중근의 동생 야고보(안명근)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들이 테라우치 총독 암살을 꾀하고 있다’는 ‘정보 보고’를 편 지로 보내자, 일제 아카보 장군에게 ‘눈길을 헤치고’ 가서 알려주었 다는 내용이 있다. 그의 밀고로 ‘신민회 105인’은 ‘일망타진’된다. 이 런 지도자로 인해 개신교, 천도교, 불교 등 종교계 지도자들이 힘을 합친 3·1운동 민족대표 33인에 가톨릭이 한 명도 포함되지 않는 것 을 비롯해 가톨릭은 한국독립운동사에 ‘국외자’로 남는다. 김수환 추기경 1993년 “정당방위·의거” 사실상 ‘복권’ 운동이 벌어졌다. 제국주의의 일원이던 프랑스인의 시각으로 식민지 백성의 의거를 ‘살인행위’로 단죄한 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가톨릭 지도부에 대한 성토가 쏟아지자 1993년 김수환 추기경은 “일제치하 한 국교회를 대표하던 어른들이 안 의사의 의거에 대한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여러 가지 과오를 범한 데 대해 우리 모두가 연대 책임을 느끼고 있다”며 “안 의사를
로 한 모든 행위는 정당방위로, 의거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로 부각하고 있다. 하지만 일제에 협조하며 가톨릭의 성장만을 꾀하던 가톨릭 지도 부의 맥을 잇는 한국 가톨릭이 ‘가톨릭에도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친 인물이 있다’며 안중근을 이용하는 데 대한 경계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근’을 조명한 김삼웅 전독립기념관장은 “권력의 편에 서서 약자의 편에 서는 신부들 을 내치는 현 가톨릭에서 안중근 정신을 찾아볼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밝혔다. 그 는 서울대교구장인 정진석 추기경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대표인 전종훈 신부를 성당 주임에서 해임시킨 것을 예로 들었다. <깨물지 못한 혀>에서 이 문제를 다룬 김유철 ‘가톨릭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집행위원장은 “한국 가톨릭은 안중근과 친일 등에 대한 참회가 선행됐다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나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 나가는 등 권력에 협조라는 이름으로 불의가 계속 이어져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보장학회를 설립한 방상복 신부는 “안중근, 노무현, 김수환 처럼 공익을 위해 개인을 버릴 수 있는 바보들 을 염원하며 가톨릭도 그렇지 못했던 과거를 참회하고 그런 행동과 삶을 보여주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안중근 의사가 아내에게 남긴 유서> 그러나 머지않아 주님의 은혜로 천당에서 다시 만날 것이오. 주님의 안배만을 믿고 신앙을 열심히 하고, 모친께 효도를 다하시오. 두 동생과 화목하며, 자식의 교육에 힘쓰길 바라오. 심신을 편안히 하고, 후세에 영원한 복락을 희망할 뿐이오. 장남(안중생) 분도를 신부가 되게 하려고 나는 마음을 결심하고 믿고 있으니 그리 알고 하느님께 바치어 장래에 (가톨릭)신부가 되게 하시오. 허다한 말은 후일 천국에서 기쁘게 만나서 상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을 믿고 또 바랄 뿐이오.
‘약자 편’ 신부 내치는 현실, ‘안중근 정신’은…
2010년 3월 26일 명동대성당에선 정진석 추기경의 집전으로 안중근(1879~1910)의사의 순국 100주년을
안중근이 19살 때인 1897년 1월 안의사와 가족, 친척들은 아버지 안태훈의 권유로 36명이 동시에
반면 뮈텔은 그해 11월 4일 서울의 일본헌병본부에서 열린 이토 히루부미의 추도식에
1890년부터 1933년 사망 때까지 우리나라 가톨릭의 최고지도자였던 뮈텔 주교는 나라 잃은 주의자의 시각으로 독립운동을 방해하며
지난해 공개된 뮈텔주교의 1911년 1월11일의 일기엔 안중근 일족과
1970년대 등장한 정의구현사제단을 중심으로 가톨릭 내에선 안중근 복권운동과 함께 안중근 정신을 잇는 포함해 일제시대에 이 땅의 국민들이 자구책으
그 이후 안중근은 가톨릭 제도권으로 되돌아오기 시작했고, 한국 가톨릭의 상징으
<안중근 평전>과 <종교, 근대의 길을 묻다> 등의 저서를 통해 ‘가톨릭교인 안중
안성 미리내실버타운에 오는 26일 안중근 동상을 봉헌하기에 앞서 5억원 가량의 바
조현 종교전문기자
우리는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하느님의 배려로 배필이 되고 다시 주님의 명으로 헤어지게 되었소.
1910년 3월 24일(사형 이틀 전) 장부 안 도마(토마스)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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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이란 이유로 40년 감옥행 -안중근의사 조카며느리
▲ 하얼빈시에서 최선옥 수녀와 함께 여생을 보내고 있는 안중근 의사의 5촌 조카며느리
안노길 할머니. 안 할머니 방에는 안 의사 사진(왼쪽)과 시할아버지 부부 사진,
그리고 비록 규격에는 맞지 않지만 손수 만든 태극기가 걸려 있다.
할머니는 17살에 안 의사의 사촌동생인 홍근씨의 3남 무생씨와 결혼했지만
일제에 의해 남편이 숨진 뒤 원래 차씨였던 성을 안씨로 바꾸고 ‘안 의사 알리기’에
매달린 채 여태 혼자 살아왔다.
특히 중국 건국 이후 대약진운동이 한창이던 1958년 종교(가톨릭) 문제로
중국 당국에 의해 반혁명죄로 체포돼 1998년 석방될 때까지
감옥과 교화소에서 외부와 단절된 40년의 세월을 보냈다.
얼마나 시달렸던지 2000년 처음으로 할머니를 만나 지금까지
현지에서 보살피고 있는 최선옥(72· 전 성모자애병원 원장) 수녀는
“차마 못볼 꼴이었다.”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세상과의 단절도 할머니의 고국사랑과 안씨 가문에
대한 열정은 식혀놓지 못했다.
감옥 안에서 치마 실오라기를 풀어 만든 태극기를 속옷 속에
수십년간 감춰 보관해올 정도로 할머니의 애국심은 오히려 커져만 갔다.
치매 때문에 정신이 가물거리긴 하지만 지금도 안 의사 관련 자료만큼은 손수 챙기고 있다.
안 의사 유해 문제를 꺼내자 할머니는 “일본놈들이 어떤 놈들인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남편의 유해도 찾지 못했다고 했다.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할머니는 안 의사 후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멀리 고국 땅에서 찾아온 방문객의 손을 따뜻하게 어루만진다.
지난해 방문객들이 용돈으로 쓰라며 쥐여준 돈 5000위안을 최 수녀를 통해
하얼빈의 안 의사 기념사업 일꾼들에게 기탁하기도 했다. 최 수녀는
“독립운동가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귀띔했다.
‘안중근’은 할머니100년 삶 그 자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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