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12일은 음력 8월 15일이므로 우리나라의 전통 명절인 '추석'입니다.
추석을 한가위라고도 합니다.
올해의 경우 추석은 월요일이 되어, 주5일근무제 기준 사일간의 연휴가 되는 셈이지요.
만약 화요일이 추석이었다면 오일간의 연휴가 될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일반적인 직장인 기준이고, 개인 사업을 하는 분들은 그다지 느낌이 없을 수 있습니다.
올해는 물가고에 추석 장보기가 더욱 힘들어 졌다고 하는 분들을 많이 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분들이 경제적으로 편안하여 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추석에 대하여 더욱 자세하게 알아 보았습니다.
추석의 어원, 추석의 유래, 추석의 풍속, 추석의 음식, 차례지내기등입니다.
추석의 풍속에는 벌초와 성묘, 차례, 강강술래, 소놀이, 씨름등 저가 알고 있는 것 이외에 거북놀이, 원놀이,가마싸움,반보기, 올게심니,밭고랑기기같은 풍속은 처음 듣는 풍속이이었습니다.
마무리로 기제사와 차례의 차이점등을 살펴 보았습니다.
자세하게 알아 보니 이제까지 예사로 생각한 것들을 보다 주의깊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1. 추석의 어원
추석은 우리 나라 4대 명절의 하나로 한가위, 중추절(仲秋節) 또는 중추가절(仲秋佳節)이라고 한다. 한가위의 한은 '하다(大·正)'의 관형사형이고, 가위란 ‘가운데’라는 뜻이다. ‘가운데’는 ‘갑다’의 어간 ‘갑’과 관형사형어미 ‘’과 ‘’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는데 변화하는 과정에서 ‘가’가 되고, 그걸 음차표기하면서 ‘가배(嘉俳)’라는 말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가’는 다시 ‘가위’로 변형되어 ‘한가위’가 된다.
지금도 신라의 고토(故土)인 영남 지방에서는 '가운데'를 '가분데'라 하며, '가위'를 '가부', '가윗날'을 '가붓날'이라고 한다.
또 8월 초하루에서 보름께까지 부는 바람을 "8월 가부새 바람 분다"라고 한다. 이로써 미루어 볼 때 가뷔·가부는 뒷날 가위로 속전(俗轉)된 것으로 알 수 있으니, '추워서'를 현재에도 '추버서'로 하는 것에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가위란 8월 중에서도 정(正)가운데란 뜻이니, 정중심(正中心)을 우리가 '한가분데' 또는 '한가운데'라고 하듯이 '한'은 제일(第一), 큰(大)의 뜻 이외에도 한(正)의 뜻이 있 음도 알 수 있다.
한가위를 추석, 중추절(仲秋節·中秋節) 또는 중추가절(仲秋佳節)이라 한 것은 훨씬 후대에 와 서 생긴 것이다. 즉 한자가 전래되어 한자 사용이 성행했을 때 중국 사람들이 '중추(中秋)'니 '추 중(秋中)'이니 하고, '칠석(七夕)'이니 '월석(月夕)'이니 하는 말들을 본받아 이 말들을 따서 합하여 중추(中秋)의 추(秋)와 월석(月夕)의 석(夕)을 따서 추석(秋夕)이라 한 것으로 생각된다.
2. 추석의 유래
추석의 기원이나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힐 수는 없지만, 고대로부터 있어 왔던 달에 대한 신앙에서 그 뿌리를 짐작할 수 있다. 고대 사회에 있어 날마다 세상을 밝혀 주는 태양은 당연한 존재로 여겼지만 한 달에 한 번 만월(滿月)을 이루는 달은 고마운 존재였다. 밤이 어두우면 맹수 의 접근도 알 수 없고 적의 습격도 눈으로 볼 수가 없기에 인간에게 있어 어두운 밤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만월은 인간에게 있어 고마운 존재였고, 그 결과 만월 아래에 서 축제를 벌이게 되었다. 그런데 만월의 밤중에서도 일년 중 가장 큰 만월을 이루는 8월 15일인 추석이 큰 명절로 여겨진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만월 아래에서 축제를 벌이고 먹고 마시고 놀면서 춤추었으며, 줄다리기, 씨름, 강강수월래 등의 놀이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고대에 만월을 갈망하고 숭상하던 시대에 이미 일년 중에서 가장 달이 밝은 한가위는 우리 민족 최대의 축제로 여겨지게 되었고, 후에 와서 의식화(儀式化)되어 명절로 제정(制定)을 보게 되어 오늘날까지 전승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가위의 기원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 잘 나타나 있다. "신라 제3대 유리왕(儒理王) 9년(서기 32년)에 왕이 6부를 정하고 왕녀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 각 부내(部內)의 여자들을 거느리게 하여 두 패로 가른 뒤, 편을 짜서 7월 16일부터 날마다 6부의 뜰에 모여 길쌈을 하는데, 밤늦게야 일을 파하고 8월 15일에 이르러 그 공이 많고 적음을 살펴 가지고 지는 편은 술과 밥을 장만하여 이긴 편에게 사례하고, 이에 온갖 유희가 일어나니 이것을 이를 가배(嘉俳)라 한다"고 하였고, 또 "이때 진 편의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면서 탄식하기를, 회소회소(會蘇會蘇)라 하여 그 음조가 슬프고 아름다웠으므로 뒷날 사람이 그 소리로 인하여 노래를 지어 이름을 회소곡(會蘇曲)이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회소곡은 온 나라 안에 퍼져서 나중에는 신라의 유명한 곡이 되어 전하였다 하나, 지금 그 노래는 전하지 아니한다. 길쌈의 협동작업은 지금도 두리삼, 또는 두레삼이라고 하여 영남지방 일대에 그 유속(遺俗)이 남아 있다.
3. 추석의 풍속
추석에 행해지는 세시풍속으로는 벌초(伐草)·성묘(省墓)·차례(茶禮)·소놀이·거북놀이·강강 수월래·원놀이·가마싸움·씨름·반보기·올게심니·밭고랑 기기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대표적인 몇 가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1) 벌초와 성묘
추석에 조상의 무덤에 가서 여름 동안 무성하게 자란 잡초를 베어 주는데 이를 벌초라 한다.
옛날 조상의 묘를 풍수설에 의하여 명당에 쓰기 위하여 몇 십리 먼 곳에까지 가서 쓰는 수가 많았고, 또 묘를 쓴 다음 이사를 가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묘가 집 근처가 아니라 먼 곳에 있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도 추석을 맞이하여서는 반드시 벌초를 하는 것이 자손의 효성의 표시와 도리로 여겼다.
한가위 때에 성묘를 와서 벌초를 안했으면 보기에도 흉할 뿐만 아니라 불효의 자손을 두었거나 임자 없는 묘라 해서 남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2) 차례
추석 이른 아침에 사당을 모시고 있는 종가(宗家)에 모여 고조(高祖)까지의 차례를 지낸다.
차례 지내는 절차가 설날과 다른 것은 흰떡국 대신 메[밥]를 쓰는 점이다. 조상에 대한 추원 보본(追遠報本)과 천신제(薦新祭)를 겸하였기 때문에 제물은 신곡으로 만들어 진열된다.
고조 이 상의 윗대는 10월에 '시제'라 해서 묘에서 제사를 지낸다.
3) 강강술래
추석의 가장 대표적인 풍속놀이이다. 1966년 2월 15일 중요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다. 해마다 음력 8월 한가윗날 밤에, 곱게 단장한 부녀자들이 수십 명씩 일정한 장소에 모여 손에 손을 잡고 원형으로 늘어서서,‘강강술래’라는 후렴이 붙은 노래를 부르며 빙글빙글 돌면서 뛰노는 놀이이다. 강강술래를 할 때는 목청이 좋은 여자 한 사람이 가운데 서서 앞소리[先唱]를 부르면, 놀이를 하는 일동은 뒷소리[合唱]로 후렴을 부르며 춤을 춘다
유래는 임진왜란 때, 당시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인 이순신(李舜臣)이 수병을 거느리고 왜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 적의 군사에게 해안을 경비하는 우리 군세의 많음을 보이기 위하여, 또 왜군이 우리 해안에 상륙하는 것을 감시하기 위하여, 특히 전지(戰地) 부근의 부녀자들로 하여금 수십 명씩 떼를 지어, 해안지대 산에 올라, 곳곳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돌면서 ‘강강술래’라는 노래를 부르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싸움이 끝난 뒤 그곳 해안 부근의 부녀자들이 당시를 기념하기 위하여, 연례 행사로서 ‘강강술래’ 노래를 부르며 놀던 것이 전라도 일대에 퍼져 전라도 지방 특유의 여성 민속놀이가 되었다.
‘강강술래’라는 말은 한자의 ‘强羌水越來’에서 온 것이 아니라, 우리말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강강’의 ‘강’은 주위 ·원(圓)이란 뜻의 전라도 방언이고, ‘술래’는 한자어로 된 ‘巡邏(순라)’에서 온 말로서 ‘경계하라’는 뜻이니, 이는 ‘주위를 경계하라’는 당시의 구호인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 주위의 뜻인 ‘강’이 둘 겹친 것은 특히 주위에 대한 경계를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술래’가 ‘수월래’로 들리며, 그렇게 기록되기 쉬운 것은, 진양조(晋陽調 또는 진양)로 길게 뽑을 때 ‘수월래’로 들리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그러므로 표기는 ‘강강술래’라고 하는 것이 옳다.
4) 소놀이
지방에 따라 이름과 놀이 시기가 다르다. '소먹이 놀음', '소놀이 굿', '나무쇠 놀음'이라고도 한다.
소를 만드는 재료는 한지(韓紙)에 흙빛 색물감을 칠하고, 들기름을 먹인 것인데 장년(壯年) 두 사람이 들어갈 만하게 큰 소를 만든다. 그 속에 앞이 되는 한 사람과 뒤가 되는 한 사람이 들어가 허리를 구부린다. 그러면 뒷사람이 두 손으로 앞사람의 허리를 껴안고 소걸음같이 걸으며 한 사람의 소몰이꾼에게 끌려 같이 가는데, 뒤에는 일행으로서 농악대가 뒤따르며 마을의 여러 집을 돌아다닌다. 비교적 부유한 집을 찾아가서는 소울음 소리를 내고, 앞에서 소를 끄는 소몰이가 대문을 두드려, "이웃집 소가 배가 고파서 왔습니다. 짚여물과 쌀뜨물을 어서 좀 주십시오" 하며 소울음 소리를 내면, 그 집 주인이 나와서 그 사람소와 일행을 대문 안으로 맞아들인다. 그러면 일행은 그 집 마당에서 한바탕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며 놀이를 벌인다. 이윽고 술과 여러 가지 음식이 나오고 이들 일행은 밤이 이슥할 때까지 마을의 여러 집을 돌아다니면서 논다.
이 놀이는 주로 경기와 황해도 지방에서 성행하던 것인데, 8월 한가윗날 하기도 하고, 또 놀이하는 방법에도 차이가 있다. 앞에 든 것은 경기 지방의 예이지만 황해도 지방에서는 농촌 청년 두 사람이 궁둥이를 서로 마주대어 엎드리고 그 위에 멍석을 덮어씌우고는 앞이 되는 한 사람은 두 개의 막대기를 양손에 각각 한 개씩 위로 내어 들고, 뒤가 되는 한 사람은 한 개의 좀 기다란 막대기를 아래로 내리 들어, 마치 소의 뿔과 꼬리처럼 만들어서 논다. 역시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노는 것이다.
경남 영산(靈山)지방에서는 정월 대보름날 나무로 소를 만들어 가지고 동부와 서부 두 편으로 나누어 '나무쇠놀음[木牛戱]'을 하기도 하고, 경기 의정부지방에서는 역시 정월 대보름날, '소놀이 굿'을 하는데, 입춘(立春)날 하는 지방도 있다.
제주에서는 농사를 권장하고 풍년을 축원하는 행사로서 입춘날 짚으로 만든 소에 바퀴를 달고 앞에서 씨할아버지(씨를 뿌리는 남자)가 씨를 뿌리며 길을 인도하면, 쟁기를 쥔 호장(戶長:고을 아전의 우두머리)들이 밭갈이 흉내를 내면서 시가를 행진한다. 이 놀이 때에는 무당들도 일제히 징과 북을 치면서 굿을 하여 풍년 들기를 비는 것이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입춘조〉에는 함경도 풍속에 입춘날이 되면 나무로 소를 만들어 관청으로부터 민가의 마을까지 끌고 나와 돌아다니는데, 이것은 흙으로 소를 만들어 내보내는 제도를 모방하여 농사를 권장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뜻을 나타내는 까닭이라 하였고, 〈상원(上元)조〉에는 경상도 풍기지방 풍속에 정월 대보름날 고을의 우두머리 아전이 검은 소를 거꾸로 타고 거문고를 안고 관아(官衙)의 뜰로 들어가 원님에게 절하고는 일산(日傘)을 받쳐들고 나오는데, 이는 복을 비는 것이라 하였다.
이 소놀이는 뒷날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지방에 따라 노는 것도 많이 달라졌으나 원래는 입춘날 하는 행사였던 것으로 보이니, 입춘이란 24절기의 하나로서 태양이 황경(黃經) 315°에 이르는 때이며, 양력으로는 2월 4일경이고, 음력으로는 정월 명절 무렵에 해당하는데, 이때부터 햇볕이 점점 따뜻해지고 봄이 시작되는 날이므로, 이 날에 농사를 권장하고, 풍년을 축원하기 위하여 그와 같은 행사를 한 것이다.
《사물기원(事物起原)》에 의하면, 주공(周公)이 비로소 입춘의 흙소[土牛]를 제정하였다 하였고, 《예기(禮記)》 〈산정월령(刪定月令)〉에는 흙으로 만든 소를 내어서 농경의 이름과 늦음을 표시하였다 하였다. 또 《겸명서(兼明書)》에는 입춘날 흙으로 만든 소에 관한 의논이 있음을 보아, 한국의 소놀이 민속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5) 씨름
우리나라 전통적인 남자 운동경기의 하나로 한문으로는 각희, 각력, 각저라고 부릅니다. 넓은 마당에서 허리와 다리에 띠나 샅바를 두른 두 장정이 마주 꿇어 앉아 각기 한 손으로는 다리의 띠를 잡은 다음 심판관의 호령에 의해 동시에 일어나 먼저 상대방을 넘어뜨림으로써 승부를 결정하는 경기 입니다. 만주 퉁구에 벽화로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고구려 때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또 고려사에 의하면 충혜왕은 씨름을 즐겨 동왕 5년(1334) 2월과 7월에 이를 관람한 기록이 나타난 것으로 보아 고려에서도 성행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후 경향 각지에서 남자들의 놀이로 단오, 백중날, 한가위, 농한기 등에 행해졌으며 특히 단오절에는 여자들의 그네뛰기와 함께 연중행사로 성대히 거행 되었습니다. 씨름은 남성을 위한 체육경기적 민중오락이며, 가장 서민적인 남성놀이입니다. 4세기 말의 고구려 <씨름무덤>의 내용으로 미루어 우리는 일찍부터 이를 즐겨온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리나라 씨름의 뿌리는 몽골로서 중국을 거쳐 들어왔으며 일본 씨름(스모우)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씨름을 하는 방식은 샅바를 매고 한쪽 무릎을 꿇어 서로 상대방의 허리와 다리를 잡아 쥔 다음 동시에 일어나서 힘과 손발의 기술을 발휘하여 먼저 상대방을 넘어뜨리면 이기면 됩니다. 보통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허리를 쥐고 왼손으로 상대방의 샅바를 잡는 데 이것을 바른 씨름이라고 하고 손잡는 것이 반대인 것을 왼씨름이라고 합니다. 경기의 기술로는 안 걸이 배치기 발걸이 둘러치기 등 여러가지가 있으며, 씨름판이라 하여 주로 백사장의 원형 판에서 이루어집니다. 또한 우승자에게 황소를 상으로 주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6) 거북놀이
수숫대를 벗겨 거북 모양을 만든 다음, 그 속에 2명(앞에 1명, 뒤에 1명)이 들어가서 마치 거북처럼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노는 놀이이다. 거북 앞에는 거북몰이가 거북의 목에 줄을 매어 끌고 가고, 그 뒤에는 농악대가 꽹과리 ·북 ·소고 ·징 ·장구 등 타악기를 치면서 동네를 한 바퀴 돈 다음, 비교적 부유한 집을 찾아가는데, 대문 앞에서 농악대가 농악을 울린 다음 거북몰이가 “이 동해 거북이 바다를 건너 여기까지 왔습니다”라고 하면, 주인이 나와서 “여기까지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았습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한다. 그리하여 그 집 마당에서 한바탕 춤을 추면서 논다. 이 때 일행 가운데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대개 꽹과리 치는 사람이 한다)이 “거북아 거북아 놀아라/만석 거북아 놀아라/천석 거북아 놀아라/이 집에 사는 사람 무병장수 하사이다/이 마을에 사는 사람 무병장수 하사이다”라고 축복의 주사(呪詞)를 부르는데, 한 구절이 끝날 때마다 꽹과리를 친다. 그렇게 한바탕 놀다가 거북이 땅바닥에 엎드려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면 거북몰이가 ‘쉬이’ 하고 손을 저어 춤과 음악을 중단시키고 주인을 향하여, “이 거북이 동해 바다를 건너 여기까지 오느라고 지쳐 누웠으니, 먹을 것을 좀 주십시오” 한다. 주인집에서는 떡 ·과일 ·술 ·밥 ·반찬 등 음식을 푸짐하게 차려 내놓는다. 일행은 음식을 먹은 뒤, 잠시 쉬었다가 거북몰이가 거북을 보고, “거북아, 음식도 먹었으니 인사나 하고 가자” 하면, 거북이 집주인을 향하여 넓죽 절을 한 후 한바탕 뛰어놀다가 다른 집으로 간다. 이렇게 차례로 큰 집을 돌아다니며 즐겁게 보낸다. 거북놀이도 지방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경기 광주 지방을 일례로 들면, 거북이 땅에 엎드려 움직이지 않는 것을, 집주인이 보면 거북몰이가 배가 고파 떡이 먹고 싶어 그런다고 말한다. 그러면 집주인이 음식을 차려 내놓는다. 그리고 거북을 만드는 재료도 수숫대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왕골이나 만초(蔓草), 나뭇잎 등을 사용한다. 거북은 바다 동물 중에서는 가장 오래 살고, 또 병이 없는 동물로 알려져 있어, 십장생(十長生)의 하나이다. 거북놀이는 거북처럼 마을 사람들의 장수(長壽)와 무병(無病)을 빌고, 또 마을의 잡귀 ·잡신을 쫓는 데서 발생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7) 원놀이·가마싸움
옛날 서당 교육은 훈장을 초빙해서 가르치는 것이었다. 명절이 되면 훈장도 고향에 가서 차례 성묘를 하게 되므로 서당은 며칠을 쉬게 되고 학동들은 자유롭게 놀 수가 있었다. 이럴 때에 학동들에 의해서 원놀이와 가마싸움이 있게 된다. 원놀이란 학동들 중에서 공부를 많이 했고 재치 있는 사람을 원님으로 선발하고 나머지 학동들 은 백성이 되어 원님께 소장을 내어 그 판결을 받는 놀이인데, 오늘날의 대학에서 행해지는 모의 재판과 그 성격이 유사하다. 이 때에 현명하고 지혜로운 원님은 사건을 잘 해결하지만 서투른 원님은 백성들의 놀림감이 된다.
장차 과거에 등과해서 벼슬을 하고 백성을 다스려야 할 학동들의 놀이로서는 매우 적격이었다. 가마싸움도 학동들이 주가 되어 행하여졌다. 훈장이 없는 틈을 타서 가마를 만들어 이웃 마을 학동들과 또는 이웃 서당의 학동들끼리 대결을 하는 놀이이다. 가마를 끌고 넓은 마당에 나아가 달음질해서 가마끼리 부딪혀 부서지는 편이 지게 되는데 이긴 편에서 당년에 등과가 나온다고 한다.
8) 반보기
추석이 지난 다음 서로 만나고 싶은 사람들끼리 일자와 장소를 미리 정하고 만나는 것을 반보기라 한다. 옛날에 시집간 여자들은 마음대로 친정 나들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녀 사이에 중간 지점을 정해서 서로 즐기는 음식을 장만하여 만나 한나절 동안 그 동안 나누지 못했던 회포를 푸는 것이 반보기인 것이다. 또 한 마을의 여인들이 이웃 마을의 여인들과 경치 좋은 곳에 집단으로 모여 우정을 두터이 하며 하루를 즐기는 수도 있다. 이 때에 각 마을의 소녀들도 단장하고 참여하게 되므로 자연스럽게 며느릿감을 선정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반보기란 중로 (中路)에서 상봉했으므로 회포를 다 풀지 못하고 반만 풀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9) 올게심니
추석을 전후해서 잘 익은 벼, 수수, 조 등 곡식의 이삭을 한 줌 베어다가 묶어 기둥 이나 대문 위에 걸어 두는데 이것을 올게심니라고 한다. 올게심니를 할 때에는 주찬(酒饌)을 차려 이웃을 청해서 주연을 베푸는 수도 있다. 올게심니한 곡식은 다음해에 씨로 쓰거나 떡을 해서 사 당에 천신하거나 터주에 올렸다가 먹는다. 올게심니를 하는 것은 다음해에 풍년이 들게 해 달라 는 기원의 뜻이다.
10) 밭고랑 기기
전라남도 진도에서는 8월 14일 저녁에 아이들이 밭에 가서 발가벗고 자기 연령 수대로 밭고랑을 긴다. 이 때에 음식을 마련해서 밭둑에 놓고 하는 수도 있다. 이렇게 하면 그 아 이는 몸에 부스럼이 나지 않고 밭농사도 잘된다는 것이다.
4. 추석의 시절음식
추석은 시기적으로 곡식과 과일 등이 풍성한 때이므로 이 즈음에는 여러 가지 시절 음식이 있다. 차례를 지내기 위해서 제찬을 준비하는데, 설날의 제찬과 별 차이가 없다. 다만 추수의 계절 이라 햇곡식으로 밥과 떡, 술을 만든다. 철이 늦은 해에는 미리 밭벼[山稻]를 심었다가 제미(祭米) 로 쓰는 일도 있다. 이렇게 햅쌀로 밥을 지으면 맛이 좋고 기름기가 있으며, 떡도 맛이 좋다.
추석의 대표적인 절식으로는 송편을 빼놓을 수가 없다. 송편 속에는 콩·팥·밤·대추 등을 넣는데, 모두 햇것으로 한다. 열나흗날 저녁 밝은 달을 보면서 가족들이 모여 송편을 만드는데, 송편을 예쁘게 만들면 좋은 배우자를 만나며, 잘못 만들면 못생긴 배우자를 만나게 된다고 해서 처녀, 총각들은 송편을 예쁘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또 임신한 여자가 태중의 아이가 여자인지 남자 인지 궁금할 때에는 송편속에 바늘이나 솔잎을 가로 넣고 찐 다음 한쪽을 깨물어서 바늘의 귀쪽이 나 솔잎의 붙은 곳을 깨물면 딸을 낳고 바늘의 뾰족한 곳이나 솔잎의 끝쪽을 깨물면 아들을 낳는 다고 하여, 이를 점치기도 한다. 특히 올벼로 만든 송편은 올벼 송편이라 부른다.
추석의 차례상에서 빠질 수 없는 또 하나의 것이 바로 술이다. 추석 술은 백주(白酒)라고 하는 데, 햅쌀로 빚었기 때문에 신도주(新稻酒)라고도 한다. 추석 때는 추수를 앞 둔 시기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풍족해진다. 사람들의 인심 또한 후해서 추석 때에는 서로 술대접을 하는 수가 흔하다.
또 이 때의 가장 넉넉한 안주로 황계(黃鷄)를 들 수 있는데, 봄에 알을 깬 병아리를 길러서 추석 때가 되면 잡아 먹기에 알맞게 자란다. 또 옛날에는 명절에 어른에게 선사하는 데에 닭을 많이 썼다. 친정에 근친하러 가는 딸은 닭이나 달걀꾸러미를 가지고 갔으며, 경사가 있을 때에 도 닭을 선물했으며,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면 손쉬운 닭을 잡아 대접하였다. 특히 사위가 찾아오면 장모는 닭을 잡아 대접하는 일이 흔했다. 녹두나물과 토란국도 추석의 절식이다. 녹두나물은 소양(消陽)한다고 하지만 잔치상에 잘 오르고, 토란은 몸을 보한다고 해서 즐긴다.
5. 차례 지내기
1) 차례상 차리기
지방이 있는쪽부터 첫 줄에는 시접(숟가락 담는 대접), 잔 반(술잔, 받침대)을 놓고 메를 올린다.
둘째 줄에는 적과 전을 놓는데 어동육서(魚東肉西)라 하여 육류는 왼쪽, 생선은 오른쪽에 진설한다. 육적(구운고기), 소적(두부 부친 것), 전(기름에 부친 것), 어적(생선구운 것)을 놓는다. 이때 생선의 머리는 오른쪽을 향하게 한다.
셋째 줄에는 고기탕, 생선탕, 두부탕 등의 탕류를 놓는다.
넷째 줄에는 좌포우혜(左鮑右醯)라 하여 왼쪽에 포, 오른쪽에 식혜를 놓는데 왼쪽부터 포, 나박김치, 삼색나물, 간장, 식혜를 올린다.
다섯째 줄에는 조율이시(棗栗梨枾)원칙에 따라 왼쪽부터 대추, 밤, 배, 곶감 등의 과일과 약과, 강정을 진설한다. 홍동백서(紅東白西)에 따라 붉은 과일인 사과는 오른쪽에 놓는데 대추를 오른쪽에 놓기도 한다.
이렇게 차렸으면 좋겠지만 요즘처럼 바삐 살면서 이렇게 준비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겁니다. 가짓수보다는 정성이 중요할 듯합니다. 먹지도 않고 버릴 것을 억지로 차리는 것보다는 맛있게 먹을 만한 것으로 적당히 준비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송편, 나물 3종 혹은 5종, 햇과일 5종, 전, 생전, 탕 각 1종 정도로만 정성껏 준비하면 되지 않을까요?
2) 신주와 지방.
제상에는 조상의 신체로 여기는 신주(神主)나 지방(紙榜)을 모신다. 신주는 닭소리, 개소리가 들리지 않는 깊은 산 속의 밤나무로 만들며 높이는 20cm 정도이다. 지방은 가주라 하여 신주가 없는 가정에서 한지에 먹으로 쓴다. 세로 22cm, 가로 6cm 면 된다.
제사가 끝나면 지방을 태워 버린다. 요즘 신주는 거의 사라지고 있으며 지방 또한 사진으로 대체되고 있다. 지방을 사용하는 경우도 과거처럼 " 현고학생부군신위" 등의 까다로운 문구보다는 “아버님 신위” 등으로 쉽게 쓰는 것을 권하는 추세다.
3) 추석 전통 제례 순서.
(1) 영신(迎新)
먼저 대문을 열고 병풍을 친다. 신주, 지방 또는 조상의 사진을 모신다.
(2) 강신(降神)
조상의 영혼을 맞는 의식, 제주가 향을 피우는 일이다. 집사자가 강신 술잔을 주면 제주는 그것을 모사(茅沙 : 그릇에다 모래를 담는 것) 위에 세 번 나누어 붓는다. 집사자는 술잔을 받아 제자리에 두고 제주는 두 번 절한다.
(3) 참신(參神)
모든 참사자가 일제히 두 번 절한다.
(4) 음복(飮福)
참사자가 한자리에 앉아 제수를 나누어 먹는 일, 음복을 끝내기 전에 제복(요즘에는 양복을 입는다.)을 벗거나 담배를 피워서는 안된다.
일반적으로 추석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해 신라시대의 길쌈놀이인 가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신라시대에 나라 안의 부녀자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한달 동안 길쌈을 하여 마지막 날인 8월 15일에 승부를 가려 진 편에서 음식을 대접하고 '회소곡'을 부르며 밤새도록 노래와 춤을 즐겼는데, 이 길쌈놀이를 가배(嘉俳)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 '가배' 오늘날 한가위의 '가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뜻은 가운데(中) 또는 반(半)이라는 의미라 한다. 따라서 한가위는 가을의 반, 중추(中秋)의 한국식 표기이다.
그리고 이맘때쯤이면 봄여름동안 땀흘려 기른 농작물이 여물어 수확을 한다.
예로부터 가을 수확을 하면 감사의 뜻으로 조상님께 먼저 햇곡식을 올리는 천신(薦新)을 했는데, 상례적으로 추석날 천신을 했었다. 그래서 차례상에 올리는 제수는 햅쌀로 만든 메, 떡, 술 등과 오색 햇과일로 마련하는 것이다.
그런데 9천년 역사를 가진 우리 민족은 이미 아주 오랜 옛날부터 추석뿐 아니라 제사풍습이 우리문화의 근간으로 깊이 자리잡아 왔다.
그리고 이 제사의 대상은 일차적으로는 조상님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우주의 주재자이신 삼신(三神) 상제(上帝)님께 제사를 지냈다.
이것을 신교(神敎) 신앙이라 하는데, 서기전 2333년에 조선을 개국한 제 1세 단군임금도 상제님께 제사[天祭]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환단고기]에 의하면 "삼한시대에 10월 상순에는 모두가 나라의 큰 축제에 참여하였다.
이때 둥근 단(圓丘)을 쌓아 하늘에 제사 지냈는데, 땅에 제사 지낼 때는 네모지게 쌓았으며(方丘), 조상에 제사지낼 때는 각목(角木)을 썼다.
제천(祭天)할 때는 임금(韓)께서 반드시 몸소 제사지냈으니, 그 예가 매우 성대하였음을 가히 알 수 있으리라........
이에 온 나라에서 제사를 받들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동예의 무천도 제천(祭天)행사라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추석이나, 조상제사는 바로 이러한 신교문화의 맥을 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이 우주 만유에는 모두 신(神)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오늘날 민간신앙의 형태로 남아 있는 당산제, 성황제, 산신제, 용왕제, 풍어제 등도 모두 신교신앙의 자취라 할 수 있다.
오늘날은 예전에 비해 제사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고 형식에 그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여전히 이 지구상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조상님 제사를 중요시 여기고 있다.
☞기제사(忌祭祀)와 차례[茶禮]의 차이점은?
먼저 기일에 모시는 것은 기제사라 하고, 명절날 모시는 것은 차례라고 하는데 어떻게 다른 것일까? 차례[茶禮]는 매월 음력 초하루, 보름, 명절, 그리고 조상님 생일날 등에 낮에 지내는 간략한 제사를 말한다.
차례는 다른 말로 다례(茶禮)라고도 하는데, 지금은 차례상에 술을 올리지만 예전에는 차(茶)를 올렸다하여 다례(茶禮), 혹은 차례[茶禮]라고 불렀다.
오늘날에는 설, 추석, 한식에만 차례를 지내고 있는데 설과 추석에는 대부분의 집안에서 다 모시고, 한식은 일부 가정에서 묘제(墓祭)형식으로 지내고 있다.
기제사[忌祭祀]와 차례[茶禮]의 차이점을 보면, 기제사는 그 날 돌아가신 조상님과 그 배우자만 지내는 반면 차례는 자기가 제사를 받드는 모든 조상을 다 지낸다. 또 기제사는 밤에 지내고 차례는 낮에 지낸다.
기제사와 차례 이외에 시제(時祭)가 있는데 이는 조상의 묘소에서 지내는 제사라 묘사(墓祀)라고도 한다. 조상신은 4대고조부까지만 기제사를 지내고 그 이상의 조상은 함께 묘제를 지낸다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국보 1호 ~ 100호 까지] (0) | 2011.10.15 |
---|---|
[스크랩] 오늘 아침 (0) | 2011.09.19 |
[스크랩] 홍루몽 (0) | 2011.09.10 |
[스크랩] 고시조 집대성 (0) | 2011.09.09 |
[스크랩]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0) | 2011.09.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