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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

깜비깜비 2011. 8. 10. 17:41

역사속의 인물속에서 교훈을 찾는 사례를 많이 접하면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아래의 박재희님의 강의속에서도 알 수 있는데, 동가식서가숙하면서 실리를 추구하자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실리를 추구하더라도, 과유불급이라 지나치면 오히려 해가 되니까 명분과 신의도 어느 정도 감안하여야 함을 조언하고 있습니다.  리더의 자질을 갖추려면 토사구팽하는 식의 리더십은  좋지 않음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뜻으로, 중용(中庸)이 중요함을 이르는 말. 《논어》의 〈선진편(先進篇)〉에 나오는 말이다.

토사구팽(兎死狗烹)

토끼가 죽으면 토끼를 잡던 사냥개도 필요 없게 되어 주인에게 삶아 먹히게 된다는 뜻으로, 필요할 때는 쓰고 필요 없을 때는 야박하게 버리는 경우를 이르는 말.

 

강의를 보겠습니다.

 

 

 

 

안녕 하십니까  박재희 입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면 얼굴이 두껍거나 속이 시커멓든가 둘 중에 하나는 되어야 한다. 예 일명 후흑학(厚黑學)으로 잘 알려진 이종오(李宗吾)의 주장입니다. 중국 신해혁명 당시 동맹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던 이종오는 얼굴이두껍고(厚顔), 마음이 시커먼(黑心) 사람들이 중국 역사에서 성공한 사람이 많다는 주장을 펼쳤는데, 남의 눈치나 체면에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과 목표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후흑(厚黑)의 대가가 되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두꺼운 얼굴로 방패를 삼고 시커먼 마음으로 창을 삼아 앞으로 전진 하라! 예의와 염치, 명분을 중요시 여기는 중국의 유교적 봉건주의 사상에 반기를 들고 실리와 실제를 추구해야 한다는 개화기 중국에서는 상당히 새로운 각도의 이론이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역사상 얼굴 두껍고 속이 시커먼 리더 중에 한명을 꼽으라면 단연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劉備)일 겁니다. 유비는 전혀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마음과 표정관리에 있어서 거의 후흑학의 최고 수준에 다다랐다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리 저리 쫓겨 다니며 눈칫밥을 먹어도 전혀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의대가였고, 급한 일이 생겼을 때 시도 때도 없이 대성통곡하여 위기를 모면했던 표정관리의 대가였습니다. 특히 동가식서가숙의 넉살과 뻔뻔함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밥은 동쪽 집에서 먹고, 잠은 서쪽 집에서 잔다는 ‘동가식서가숙’이란 말이 나온 배경은 이렇습니다. 

중국의 대표적인 백과전서 중에 하나인 《태평어람(太平御覽)》에는 동가식서가숙이란 어원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산동성의 옛 지명인 제(齊)나라에 어떤 처녀가 있었답니다.  인물도 좋고 집안도 좋은 그 처녀에게 어느 날두 집안에서 청혼이 들어왔는데, 동쪽집의 신랑감은 인물은 볼 것이 없으나 부잣집 아들이었고, 서쪽집의 신랑감은 인물은 뛰어나지만 집안은 볼 것 없는 가난한 집이었습니다. 인물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부를 선택할 것인가? 처녀의 부모는 처녀에게 뜻을 물었고 처녀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밥은 동쪽 집에서 먹고 잠은 서쪽 집에서 자면 안 되나요?.” 일명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의 이란 말이 나온 부분인데요. 집안 좋은 총각과 낮 생활을 같이하며 부를 누리고, 얼굴 잘 생긴 총각과는 밤 생활을 같이 하며 사랑을 즐기고 싶다는 대답이었죠. 이런 실리적인 생각은 옛날 일만은 아닌 듯싶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비슷한 질문을 하면 동가식서가숙의 대답을 뺨치고 있습니다. 결혼 전에 연예는 마음에 들고 잘생긴 사람과 하다가, 결혼은 부모님의 정해 주신 유능한 사람과 하고 싶다는 유비에 버금가는 후흑의 대가 같은 대답 말입니다. 어쩌면 현실적이고 똑똑한 대답 같기도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씁쓸해지는 대목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아낌없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선택하겠다는 어딘가 젊은이다운 패기가 느껴지는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 것. 너무 감상적인 생각인가요?

조선시대 수필집 <한거만록(閑居漫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태조(太祖)가 개국한 다음 조정에서 재신(宰臣)들을 불러 정부(政府)에서 주연을 베풀었습니다. 한 때는 고려왕조에 충성을 맹서했던 대신들이었지만 새로운 정권에 동조하며 새로운 지위를 약속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연회에는 설매(雪梅)라는 기생이있었습니다. 그 기생은 뛰어난 미모 덕에 많은 사내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기생 역시 어느 사내든 마다 않는 것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여인이었습니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어떤 늙은 정승이 술이 취해서 설매(雪梅)라는 기생에게 치근대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는 아침에는 동가식(東家食)하고 저녁에는 서가숙(西家宿)하는 기생이니 오늘 밤에는 이 늙은이의 수청을 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그러자 설매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동가식서가숙하는 천한 기생이, 어제는 왕 씨를 모시다가 오늘은 이 씨를 모시는 정승 어른을 모시는 것이야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늙은 정승은 얼굴은 벌게지고 고개는 고개를 들지 못하였고, 어느 대신은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고 합니다. 지난날 주군을 버리고 새로운 주군을 모시는 대신들이 기생의 가슴을 찌르는 한 마디 말에 모두 맥을 못 추었던 것이죠.

우리는 어쩌면 동가식서가숙에 익숙해진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명분과 신의 보다는 실리와 이익을 위해서 동쪽 집과 서쪽 집을 왔다 갔다 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을 바꾸는데 익숙해진 그런 삶 말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충성을 맹서하며 모든 것을 주었던 동쪽 집에, 오늘은 서쪽 집에서 잠을 잔다며 모든 수사(修辭)를 동원하여 동쪽 집을 비난하고, 어제 몸담았던 조직에 적이 되어 칼을 들이대는 품위도 명분도 신의도 없는 그런 삶의 방식 말입니다. 왕 씨를 섬기든 이 씨를 섬기든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 같지 않습니다. 다만 적어도 지난날 한번 신의를 맺었던 사람을 비난하고 호도하는 것은 리더가 해야 할 일은 아닌 듯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종오 李宗吾 (1879∼1944)

청나라 말기인 광서 5년 중국 사천에서 태어났다. 농부였던 그의 부친은 9남매 중 여섯 째 아들인 리 쭝우만 공부를 시켰다. 리 쭝우는 사천에서 팔고문의 대가로 알려진 노단(盧彖)에게 수업을 받은 후 성도고등학당에서 수학했다. 학업을 마친 뒤에는 손문이 결성한 동맹회에 들어가 활동했다. 신해혁명이 일어난 1911년, 성도의 에 「후흑학」과 「후흑경」, 「후흑전습록」을 연재해 독자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당시 공자 등 중국 성인들을 비판한 「성인에 대한 회의」도 탈고했지만 사회적인 반발이 심해 발표하지 못했다.
1912년부터 몇 해 동안 사천성 관원으로 일했으며 이때부터 자신을 ‘후흑교주’라 부르며 제자들과 함께 ‘후흑국’ 건설에 나섰다. 1917년에는 교육계에 투신, 부순현중학교와 면양성중학교 교장을 지냈고 1922년에는 사천성 장학관에 임명되어 졸업시험 실시 등 다양한 교육개혁안을 시행하기도 했다. 이후 관직에서 물러난 그는 성도 에 「후흑사관」과 「후흑학발명사」, 「후흑철학」 등을 연재했고, 이 글이 1936년 북경에서 『후흑학』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묶여져 다시 한 번 중국 사회에 파장을 일으켰다. 리 쭝우는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타계할 때까지, 일제와 서구 열강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후흑’의 길밖에 없다며 왕성한 집필활동을 보였다.

 

▶저서 "후흑학" 관련 글

 

노자와 한비자의 제왕학『후흑학』. 이종오는 중국의 지식인들이 서양의 사회진화론 및 제국주의 이론에 압도된 상황에서 중국 전래의 사상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토대로 서양의 이론을 신랄히 비판하고 나선 인물이다.

 

이기면 모든 것이 미화돼 ‘절세의 구세주’가 되고, 패하면 모든 것이 폄하돼 ‘만고의 역적’이 된다. 이종오는 후흑을 주창하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당초 나는 글을 알아 책을 읽기 시작한 후 영웅호걸이 되고자 했다. 사서오경을 읽었으나 아무 소득이 없었다. 제자백가와 24사를 통해 얻고자 했으나 이 또한 아무 소득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옛날에 영웅호걸이 된 자는 분명히 세상에 전해지지 않는 비술이 있었을 텐데 다만 내가 못나서 그것을 찾아내지 못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던 중 흥망성쇠와 사신史臣의 논단이 완전히 상반되고 있음을 알게 됐다. 그 비결을 알기 위해 무진 고생했음에도 쉽게 찾아내지 못했다. 결국 연구를 거듭한 끝에 옛 사람의 성공 비결은 낯가죽이 두꺼운 ‘면후’와 속마음이 시꺼먼 ‘심흑’에 지나지 않는다는 천고의 비결을 찾아내게 되었다.

승자의 역사인 사서의 기록을 살펴볼 때 반드시 그 이면을 면밀히 검토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종오도 사서를 읽을 때 그 행간을 읽음으로써 절세의 구세주와 만고의 역적이 엇갈리게 된 배경을 찾아냈다. 절세의 구세주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승리해야 하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후흑의 달인이 되어야 한다는 게 바로 그가 24사를 통독한 뒤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이다. ---p.36

허장성세는 군사와 외교 방면에서 자주 구사되는 술책이다. 기본적으로 막강한 무력이 뒷받침될 때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할 경우 기껏해야 소위 ‘블러핑bluffing’으로 상대방을 일시적으로 속일 수 있을 뿐이다. 블러핑은 일시적으로 상대방으로 하여금 전면 승부로 착각하게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이를 계속해서 구사할 경우 오히려 자신의 허약한 패를 상대방에게 읽혀 낭패를 당할 소지가 크다. 드러내지 않고 실력을 키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게 바로 칼날의 빛을 칼집에 감추고 실력을 기르는 도광양회다.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던 중국이 개력개방 30년 만에 G2로 우뚝 선 비결이기도 하다. ---p.219

난득호도 수준에 이른 오바마의 후흑 행보는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나타났다. 그는 원자바오 총리와 악수할 때 고개를 45도가량 숙였다. 반면 원자바오는 목을 꼿꼿이 세우고 그를 맞았다. 원자바오는 ‘제2의 주은래’라는 칭송을 들을 정도로 서민적이고 겸손한 사람이다. 그가 목을 세운 것은 중국인들의 자존심을 복돋워주기 위한 몸짓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오바마의 후흑 속셈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당시 오바마는 자신의 몸을 한껏 낮춰 이같이 말했다.
“미국 경제는 중국 덕분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유일무이한 슈퍼 파워 미국의 자존심은 찾을 길이 없다. 아무리 미국의 위상이 예전만 못하다 할지라도 과연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비하하는 표현을 써가며 중국 수뇌부의 자부심을 부추길 필요가 있었던 것일까? 아직도 미국을 유일무이한 슈퍼 파워로 여기고 있는 미국인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힌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의 이런 행보는 치밀한 계산 끝에 나온 고단수의 술책이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 21세기에 들어와 미국이 계속 유일무이한 슈퍼 파워 역할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할을 분담할 그럴듯한 파트너가 필요한 것이다. 아무리 눈을 씻고 돌아봐도 중국밖에 없다. 중국 사람들은 ‘면자(面子;체면)’를 좋아한다. 그렇다면 미국은 그들의 면자를 한껏 북돋워 실리를 챙길 필요가 있다. ---pp.300-301

주의할 것은 글로벌 경제 전쟁의 총사령관 격인 최고 통치권자를 비롯해 일부 글로벌 기업의 총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상사’와 ‘하사’의 리더십을 공히 발휘해야 한다는 점이다. 문제는 ‘상사’와 ‘하사’의 리더십이 충돌하는 데 있다. 난세의 군주는 자신의 속마음을 내보여서는 안 되고, 반대로 난세의 신하는 군주를 설득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군주의 속마음을 정확히 헤아려야 한다. 또한 난세의 군주는 자신의 지혜와 힘을 써서는 안 되고, 반대로 난세의 신하는 자신의 지혜와 힘을 함부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정부와 기업의 최고 통치권자와 글로벌 기업의 총수 밑에 있는 층층시하의 수많은 간부들은 과연 어떤 리더십을 구사해야 하는 것일까? 말할 것도 없이 ‘하사’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그래야 총수의 신임을 바탕으로 자신의 지략과 소신을 펼칠 수 있고, 휘하의 하사에게도 존경을 받을 수 있다. ---pp.331-332

[YES24 제공]

 

 

 

 

 

 

 

출처 : 불 도 저
글쓴이 : 불도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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