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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정 스님의 유언 ◑

죽게 되면 말없이 죽을 것이지 무슨 구구한 이유가 따를 것인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지레 죽는 사람이라면 의견서(유서)라도 첨부되어야겠지만,

제 명대로 살 만치 살다가 가는 사람에겐 그 변명이 소용될 것 같지 않다.

그리고 말이란 늘 오해를 동반하게 마련이므로, 유서에도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있다.


그런데 죽음은 어느 때 나를 찾아올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많은 교통사고와 가스 중독과 그리고 원한의 눈길이 전생의 갚음으로
나를 쏠는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죽음 쪽에서 보면 한 걸음 한 걸음 죽어 오고 있다는 것임을 상기할 때,

사는 일은 곧 죽는 일이며, 생과 사는 결코 절연된 것이 아니다.

죽음이 언제 어디서 나를 부를지라도 "네" 하고 선뜻 털고 일어설
준비만은 되어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유서는 남기는 글이기보다 지금 살고 있는 '생의 백서白書'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육신으로서는 일회적일 수밖에 없는 죽음을 당해서도

실제로는 유서 같은 걸 남길 만한 처지가
못 되기 때문에 편집자의 청탁에 산책하는
기분으로 따라 나선 것이다.


누구를 부를까? 유서에는 흔히 누구를 부르던데?

아무도 없다. 철저하게 혼자였으니까.

설사 지금껏 귀의해 섬겨온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그는 결국 타인이다.

이 세상에 올 때도 혼자서 왔고 갈 때도 나 혼자서 갈 수밖에 없다.

내 그림자만을 이끌고 휘적휘적
삶의 지평을 걸어왔고 또 그렇게 걸어갈 테니 부를 만한
이웃이 있을 리 없다


물론 오늘까지도 나는 멀고 가까운
이웃들과 서로 왕래를 하며 살고 있다. 또한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생명 자체는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것이므로 인간은 저마다
혼자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보랏빛 노을 같은 감상이 아니라 인간의 당당하고 본질적인 실존이다


고뇌를 뚫고 환희의 세계로 지향한 베토벤의 음성을 빌리지 않더라도,

나는 인간의 선의지善意志 이것밖에는 인간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온갖 모순과 갈등과 증오와 살육으로
뒤범벅이 된 이 어두운 인간의 촌락에 오늘도 해가 떠오른 것은 오로지
그 선의지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 내가 할 일은 먼저 인간의 선의지를 저버린 일에 대한 참회다.

이웃의 선의지에 대해서 내가 어리석은 탓으로 저지른 허물을 참회하지 않고는
눈을 감을 수 없는 것이다.

때로는 큰허물보다 작은 허물이 우리를 괴롭힐 때가 있다.

허물이란 너무 크면 그 무게에 짓눌려 참괴(慙愧)의 눈이 멀고 작을 때에만
기억이 남는 것인가.

어쩌면 그것은 지독한 위선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평생을 두고 그 한 가지 일로 해서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자책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문득문득 나를 부끄럽고 괴롭게 채찍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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