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82년의 야구를 설명하려다보니 9월에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먼저 언급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각팀의 선수단 소개에서 설명했듯이 원년의 각팀의 선수단 구성은 이 대표팀에 묶여있던 보류선수로 인해 많은 변수가 발생했고 순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1982년 제27회를 맞았던 서울의 세계야구선수권대회.
5년전인 77년 니콰라과에서 벌어진 슈퍼월드컵에서 사상최초로 한국이 우승한 적이 있긴 했지만 세계선수권에 비하면 한단계 격이 떨어졌던 대회였고 80년 도쿄대회에서 준우승을 거둔 것이 이 선수권대회에서는 최고성적이었습니다.
아시아야구대회는 몇번 개최한 경험이 있지만 세계대회는 처음으로 유치했던 터라 국제경기를 치룰 경기장이 없었는데 마침 88년 올림픽 개최가 81년에 확정되면서 잠실에 매머드 스포츠타운이 계획되고 있던 시점.
당시 올림픽 정식종목에 야구가 없었기 때문에 야구장 건립계획은 없었지만 이 82년대회유치를 내세운 야구인들의 청원으로 잠실 스포츠타운에 야구장도 포함이 되는 것으로 설계가 변경됩니다.
즉 잠실야구장은 프로야구를 위해 건립된 경기장이 아니라 82년 세계대회를 위해 건립된 곳이었고 그 때문에 펜스의 길이가 여타구장들보다 훨씬 멀게 설계가 된 것입니다.
대회를 준비하고 있던 중에 한국에는 프로야구가 먼저 출범하면서 큰 인기몰이를 시작합니다.
당시에 이러한 공식적인 세계대회에는 아마추어 자격을 갖고 있는 선수들만 참가가 허용이 되었기 때문에 기존의 야구협회와 새로 출범한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선수선발과정에서 큰 충돌을 일으킵니다.
야구협회로서는 당연히 대표급 선수들의 프로행을 막고 싶어했고 KBO는 첫해 흥행을 위해서 스타급 선수들을 포함시키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절충된 것이 선수생활이 얼마 안남은 노장선수들,그리고 몸상태가 좋지않았던 선수들을 대거 대표팀에서 제외하고 대표팀에서 반드시 필요로 했던 몇명의 선수들만 1년간 프로행을 유보시키기로 합의합니다.
당시 야구협회에서 양보하지 못했던 대표팀 필수요원, 그 선수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최동원, 임호균 (이상 투수), 심재원(포수), 김재박(내야수), 유두열, 김일권, 이해창(이상 외야수)
이 7명의 선수외에 김시진과 장효조, 정구선 등은 군복무중이라 어차피 프로행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대표팀선발에 큰 어려움이 없었고 고려대를 졸업하는 박종훈은 스스로 세계대회 참가를 위해 프로행을 거부하면서 일단 10여명의 선수를 확보한 후 나머지는 대학선수로 보충하는 것으로 결정됩니다.
프로출범 이전에 대학선수들이 대표팀 유니폼을 입는다는 것이 극히 드믄 경우였기 때문에 절반의 선수를 대학재학선수로 뽑는다는 것은 대표팀의 상당한 전력약화 우려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위에 보류선수 7명은 당장 프로에 입단하겠다면서 당연히 거세게 반발합니다.
협회측으로서는 아마에 1년 남는 것에 대한 일정의 댓가를 보상하고 예나 지금이나 전가의 보도인 '애국심'을 앞세우면서 이들을 달랬지만 이 조치에 끝내 납득하지 못했던 한명이 기어이 사고를 치게 됩니다.
프로출범을 하루 앞두고 김일권이 대표팀을 무단이탈해서 해태타이거스 캠프에 합류해 버린 것이죠.
강력한 징계를 받아도 할말없는 상황이었지만 해태의 심각한 선수부족과 당시 민감했던 호남정서 달래기, 그리고 김일권 개인이 호소했던 극심한 생활고 등을 이유로 프로팀 입단이 어렵게 허용되었던 것은 해태타이거스편에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롯데소속이었던 최동원과 이해창은 팀이 없어지면서 1년간 한시적으로 한국전력과 한국화장품으로 각각 소속팀을 바꾼 가운데 나머지 보류선수들은 무사히 대회에 참가하게 됩니다.
한명이 줄어서 6명이 된 보류선수들, 그리고 군복무중인 선수들, 그리고 절반에 가까운 대학생들로 구성된 82년도 대표팀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감독 - 어우홍(한국전력 감독)
코치 - 배성서(한양대 감독), 김충(상업은행 감독)
투수 - 최동원(한전), 김시진(경리단), 임호균(한전). 박동수(동아대), 오영일(인하대), 선동열(고려대), 박노준(고려대)
포수 - 심재원(한국화장품), 김진우(인하대), 한문연(동아대)
내야수 - 김재박(한국화장품), 이석규(경리단), 정구선(경리단), 박영태(동아대), 이선웅(인하대), 한대화(동국대)
외야수 - 이해창(한국화장품), 유두열(한전), 장효조(경리단), 조성옥(동아대), 김정수(고려대)
대회에 참가하겠다면서 프로행까지 자진해서 미루었던 박종훈(상업은행)이 부상으로 결국 탈락했고 예비후보로 올라있던 김상훈(동아대)도 제외되면서 21명으로 꾸려진 선수단.
그간에 대표팀 구성원에서 포수와 유격수, 외야수 한두명을 제외하면 완전히 물갈이된 젊은, 그리고 다소 불안한 대표팀명단이었습니다.
심지어 가장 좋은 성적을 올려야할 자국대회에서 사상 최약체의 대표팀이 구성되었다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수년간 대표팀을 이끌었던 김응용감독은 야구유학을 이유로 해외체류중이었고 다른 지도자들도 프로의 옷을 입었기 때문에 마땅한 대표팀감독감도 없던 상황에서 선정된 어우홍감독. 이 어감독도 오랜기간 현장을 떠나 협회일을 하다가 몇년만에 한국전력 감독으로 복귀하면서 현장적응력이 우려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어우홍감독은 김봉연이 그동안 굳게 지켜왔던 1루수자리에 포수요원인 김진우를 기용하고 김용희가 떠난 3루자리에 동국대 4학년이었던 한대화를, 김일권의 빈자리였던 외야에 동아대 3학년 조성옥을 발탁합니다.
한국야구의 양대 에이스 최동원과 김시진이 전년도까지의 무리로 대회직전까지 컨디션을 찾지못하면서 대신에 일취월장중이던 고려대 2학년 선동열에게 주요경기에 투입하는 에이스 역할을 맡기기로 했고 투타에서 모두 기용이 가능했던 대표팀 막내 박노준(고려대 1학년)을 유일한 좌투수와 대타요원으로 두루 활용하기로 합니다.
도대체가 한두가지가 아니었던 불안요소를 그대로 안으면서 예정된 9월에, 개장된지 얼마 되지않아 윤이 번쩍번쩍 나던 잠실야구장 홈그라운드에서 첫판 이탈리아전을 치루며 대회는 시작됩니다.
비록 프로야구 출범으로 이선희, 김봉연, 김용희, 배대웅 등 많은 주력선수들이 빠져나가긴 했지만 한국은 홈그라운드라는 이점을 갖고 있던 데다가 세계최강 쿠바가 적대국이라는 이유로 참가를 거부하면서 일단은 이번대회 목표를 우승으로 잡고 있었습니다.
우승을 하기 위해서 역시 걸림돌은 국제무대에서 우리보다 한수 위였던 미국과 일본, 그리고 당시 자유중국으로 불리던 대만정도가 다크호스였죠.
나머지 참가팀은 호주, 캐나다, 도미니카, 파나마,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 전체 10개국.
당시 세계선수권의 대회룰은 별다른 결승리그나 결승전없이 참가팀 전체가 풀리그를 벌여 가장 승율이 좋은 팀이 우승을 차지하는 방식.
조금은 흥행을 염두하지 않은 다소 싱거운 방식이지만 그만큼 한경기 한경기 중요하지 않은 경기가 없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제1일 이탈리아전 1:2 패>
그렇게 우승을 노린다고 하는 팀이 개막전에 네덜란드와 함께 대회 최약체로 분류되던 이탈리아에게 일격을 당하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한국은 에이스중 한명인 김시진을 선발로 앞세웠고 김재박을 1번으로, 이해창-장효조-심재원 등 국제경기 백전노장들을 중심타선으로 내세웠는데 4회 장효조의 3루타와 심재원의 적시타로 선취점을 낸 것을 제외하면 철저하게 이탈리아 투수의 변화구에 농락을 당했습니다.
호투하던 김시진이 7회 2점을 내주면서 역전을 허용하자 나머지 2이닝에 최동원을 내세웠는데 사실 김시진-최동원 계투라면 그동안 최강팀들을 상대로 써먹었을 만큼 필승계투였죠.
최동원이 나머지 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긴 했지만 타자들이 끝까지 점수를 뽑아내지 못하면서 1-2 생각지도 않은 패배를 당하며 향후 일정에 큰 부담을 안게 됩니다.
<제2일 미국전 2-1 승>
충격의 1패를 당한 한국은 이틀째 우승후보 미국과 만납니다. 공교롭게도 미국 역시 캐나다에게 첫경기를 패하면서 우승후보지만 1패씩을 안은 팀끼리의 경기. 여기서 지는 팀은 사실상 우승권과 멀어지는 단두대매치였죠.
한국은 나이는 막내였지만 페이스가 가장 좋은 선동열을 미국전 선발로 기용합니다.
당시 20세의 대학 2학년생 선동열은 1회 시작과 함께 1-2번타자에게 안타와 2루타를 맞으면서 불안한 선취점을 빼앗겼지만 이후 9회까지 3안타 무실점으로 막으면서 완봉에 가까운 완투승을 거두며 큰 산을 넘게 됩니다.
<제3일 네덜란드전 11-0 승>
약체팀을 만나 여유있게 선수를 기용하면서 7회 콜드게임승.
오영일-박동수-박노준, 대학선수들로만 마운드를 운용하면서 주력선수들을 아꼈고 공격에서는 김재박과 이해창이 각각 홈런을 기록합니다.
한편 미국은 호주를 콜드게임으로 대파하면서 세경기만에 첫승을 올렸고 첫날 한국을 잡은 복병 이탈리아는 이날도 3-2로 일본을 잡으면서 파란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이 강호 두팀을 잡은 2승이후 더이상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서 결국 최하위가 됩니다.)
<제4일 대만전 6-0 승>
물론 당시 이름은 대만이 아니었습니다. 자유중국 혹은 그냥 중국이었죠. 국명이야 어쨌건 당시의 대만은 에이스 곽태원을 주축으로 한 세계의 강호중 한팀.
다행히 한국전에 곽태원은 나오지 않았고 한국은 선동열을 내세우면서 비교적 낙승을 거둡니다.
대만은 앞선 일본전을 포함해 2패째를 당했고 한국은 1패를 키프. 선동열은 미국전 1실점 완투승에 이어 이번에는 완봉승을 거두면서 아직은 조금 어색하지만 실질적인 대표팀 에이스로 떠오르게 됩니다.
한편 9번타자로 기용된 3루수 한대화는 2안타를 홈런과 3루타로 기록하며 수훈갑이 됩니다.
<제5일 파나마전 4-2 승>
혹사 후유증으로 대회직전까지 컨디션이 엉망이었던 원조 에이스 최동원이 모처럼 호투했고 대회 첫 등판한 임호균이 마무리.
한국에 스피드건이 최초로 도입되었던 연세대시절 국내에서 유일하게 150km를 기록할 정도로 강속구가 트레이드마크였던 최동원은 이무렵 구위가 많이 내려가 있었는데 오랜 국제경기 감각으로 노련하게 경기를 이끌었습니다.
한국은 4안타의 빈궁한 공격력이었지만 간간히 터지는 적시타와 파나마 투수들의 제구력난조로 힘겨운 승리를 거두게 되죠.
대회가 절반의 스케줄을 소화한 시점에서 한국과 일본이 4승1패로 공동선두, 미국과 대만이 2패를 지켜가면서 그 뒤를 쫓는 형국.
<제6일 캐나다전 5-1 승>
언더핸드 박동수를 선발로, 김시진이 중간, 그리고 일정상 여유가 있던 선동열에게 마무리 2이닝을 맡기면서 깔끔하게 승리.
타선에서 1번 김재박과 9번 한대화가 좋은 타격감을 유지하면서 2안타씩을 쳐 팀을 이끌었습니다.
일본이 미국을 이기면서 미국은 3패째로 우승권에서 멀어지게 되어 마지막날로 잡혀있는 한일전이 실질적인 결승전이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제7일 도미니카전 3-0 승>
선동열 다음으로 이번대회 컨디션이 좋았던 박동수와 임호균의 합작완봉승.
일본도 승리를 거두면서 양국은 1패를 계속 유지했고 대만도 2패이후 계속 승리했지만 한일 양국간의 대전이 남아있는 관계로 대만은 준우승이상을 기대하긴 힘들게 됩니다.
<제8일 호주전 7-6 승>
이번대회 이탈리아와 함께 2승으로 최하위순위를 달리고 있던 호주였는데 한국은 또다시 약체팀에게 고전을 면치못했습니다.
15회 연장접전끝에 막판 대타로 기용된 박노준의 수훈으로 승리.
문제는 경기가 길어지면서 이튿날로 연장승부가 넘어갔고 승리는 했지만 잠시후에 일본전을 또 갖는 강행군을 갖게 된 것이었습니다.
한국은 최동원이 선발로 나와 4이닝을 던지고 오영일에 이어 김시진도 4이닝, 10회부터 임호균이 6이닝을 던지면서 선동열을 제외한 주력투수들을 소진합니다.
선발 최동원의 5회 5실점으로 8회까지 6-3으로 리드당하면서 마지막 한경기를 남기고 또 불의의 일격을 당하나 싶었지만 8회 2점, 9회 1점으로 극적인 동점을 만든 후에 다음날 15회말 결승점을 올렸습니다.
반면 일본은 파나마를 가볍게 꺽으면서 여유있게 한국전을 대비할 수 있게 되었고 2패를 유지하던 대만이 미국에게 1점차로 패하면서 결국 예상대로 한일간의 마지막 경기는 1-2위를 다투는 운명의 결승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일본전.
10개국이 풀리그를 벌여 남은 한경기.
한국과 일본은 8경기동안 7승1패로 공동선두를 달리면서 마지막날 운명의 대전을 갖게 됩니다. 이미 3위권인 미국과 대만이 3패씩을 하면서 우승권과 멀어지면서 마지막날 대전하게되는 양국이 이날의 승패에 따라 1-2위를 나눠갖는 결승아닌 결승.
한국은 이번 대회 미국, 대만과 같은 강호들을 잡아주면서 새로운 대표팀 에이스로 등극한 선동열을 다시한번 선발로 등판시킵니다.
대신 타순은 대폭 변경되었는데 그 이유는 전날 연장승부를 내지못하면서 밀린 경기를 당일 낮에 소화하느라 생긴 체력적 부담과 대회 컨디션을 감안한 것으로 보입니다.
1-2번으로 기용되던 김재박과 조성옥의 타순을 맞바꾸고 클린업으로 나오던 심재원과 하위타선으로 나오던 한대화를 맞바꾼 타순.
동국대 4학년이었던 한대화는 이번대회 처음으로 국가대표에 선발된 선수지만 절정의 타격감으로 연일 맹타를 보여주면서 중요한 경기에 일약 클린업트리오에 포함되는 파격적인 기용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날의 타순 및 수비위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1번..조성옥(중견수)
2번..김재박(유격수)
3번..이해창(DH)
4번..장효조(우익수)
5번..한대화(3루수)
6번..유두열(좌익수)
7번..이석규(1루수)
8번..심재원(포수)
9번..정구선(2루수)
1회 주자1루에서 일본타자의 안타성 타구를 좌익수 유두열이 어설픈 수비로 뒤로 빠트리면서 이것이 3루타가 되면서 한점을 내주고 또 다음 타자에게 희생플라이를 허용. 초반부터 두점을 내주게 됩니다.
그뒤 팽팽한 투수전이 벌어지는데 한국은 7회까지 한대화가 친 내야안타 한개만을 기록하면서 완벽하게 일본선발에게 봉쇄당하고 있었습니다.
운명의 8회말.
8번 심재원이 두번째 안타를 치고 나갔고 이어 정구선 타석에서 대타 김정수(고려대 4년)가 중견수키를 넘기면서 잠실구장 가운데 펜스앞에 떨어지는 통쾌한 2루타로 1루주자를 불러들입니다.
1번타자 조성옥의 희생번트로 1사 주자 3루.
이어 2번 김재박. 볼카운트 1/1에서 어감독의 사인을 지켜보면서 타석에 들어섭니다.
우선 동점을 만들기위해 스퀴즈 사인이 나오게 되고 이를 간파한 일본투수는 볼을 높이 빼버립니다만 다급한 김재박은 껑충 뛰어올라 필사적으로 배트를 갔다 댔는데 이 타구가 절묘하게 3루선상을 타고 흐르게 됩니다.
마치 만화에나 나올법한 그 유명한 캥거루번트.
후일담을 들어보면 어우홍감독은 스퀴즈 사인을 내지 않았었다고 하고 그 증거로 3루주자도 스타트를 하지 않았지만 워낙에 절묘한 번트타구였기 때문에 늦게 뛰어든 3루주자도 득점에 성공하면서 동점이 되고 타자주자도 사는 내야안타가 됩니다.
여세를 몰아 3번 이해창의 중전안타에 1루주자 김재박이 3루까지 달리면서 1사 주자 1.3루.
4번 장효조는 2루수 땅볼로 병살위기였지만 전진수비하던 일본의 2루수는 홈으로 공을 던지면서 3루주자를 아웃시킵니다.
행여 병살처리에 실패하게 되면 역전이 되기 때문에 선택한 수비였지만 결과적으로 뒤에 나온 결과를 보면 이 수비는 일본측의 큰 패착이 되고 맙니다.
이어서 나온 5번 한대화의 좌측폴대를 맞추는 3점홈런.
나중에 해결사로까지 불리는 한국야구사상 가장 뛰어난 클러치히터가 탄생하는 순간으로 그날의 그림같은 역전승에 마침표를 찍던 순간.
7회까지 꽁꽁 막혀있던 한국팀의 봇물이 터지면서 순식간에 5대 2로 벌어지게 됩니다.
한일전 8회 징크스의 시작이 바로 이 게임이기도 했구요.
9회 선동렬이 일본타선을 막아내던 순간까지 관중들은 한대화를 연호했고 게임이 끝난뒤 대회 MVP를 발표하는 발표자가 선동렬을 말한다는게 분위기에 휩쓸려 한대화라고 해버려 다음날 수상자가 조용히 뒤바뀌는 해프닝까지 있었습니다.
승리의 주역인 한대화와 선동열은 그 이후 해태에서도 찰떡궁합을 보여주면서 인연을 이어갔고 지도자가 되면서까지 함께 움직이는 콤비가 됩니다.
세계선수권대회의 첫 우승이자 당시 왜곡교과서 문제로 반일감정이 극에 달해 있던 분위기라 더욱더 통쾌한 일본전 승리가 되었고 당해 시작된 프로야구와 함께 야구의 인기는 급속도로 높아졌던 계기가 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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