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법정 스님의 유언
◐ 법정 스님의 유언 ◑
죽게 되면 말없이 죽을 것이지 무슨 구구한 이유가 따를 것인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지레 죽는 사람이라면 의견서(유서)라도 첨부되어야겠지만, 제 명대로 살 만치 살다가 가는 사람에겐 그 변명이 소용될 것 같지 않다.
나를 쏠는지 알 수 없다.
준비만은 되어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육신으로서는 일회적일 수밖에 없는 죽음을 당해서도
못 되기 때문에
기분으로 따라 나선 것이다.
삶의 지평을 걸어왔고 이웃이 있을 리 없다
이웃들과 서로 왕래를 하며 살고 있다.
혼자일 수밖에 없다.
나는 인간의 선의지善意志 이것밖에는 인간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뒤범벅이 된 이 어두운 인간의 촌락에 그 선의지 때문이 아니겠는가.
눈을 감을 수 없는 것이다. 때로는 큰허물보다 작은 허물이 우리를 괴롭힐 때가 있다.
기억이 남는 것인가. 어쩌면 그것은 지독한 위선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평생을 두고 그 한 가지 일로 해서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자책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문득문득 나를 부끄럽고 괴롭게 채찍질했다.
어울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서였다.
말을 더듬는 불구자였다.
엿을 슬쩍슬쩍 빼돌렸다. 돈은 서너 가락치밖에 내지 않았다. 불구인 그는 그런 영문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일이, 돌이킬 수 없는 이 일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가 만약 넉살 좋고 건장한 엿장수였더라면 나는 벌써 그런 일을 잊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장애자라는 점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 자책은 더욱 생생하다.
허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그때 저지른 그 허물이 줄곧 그림자처럼 나를 쫓고 있다.
참회하지 않을 수 없다.
과보라 생각하면 능히 견딜 만한 것이다.
"날카로운 면도날은 밟고 가기 어렵나니 현자가 이르기를 구원을 얻는 길 또한 이같이 어려우니라." <우파니샤드>의 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다.
일도 없을 것이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은 우리들 사문의 소유 관념이다. 그래도 혹시 평생에 즐겨 읽던 책이 내 머리맡에 몇 권 남는다면, 아침 저녁으로 "신문이오" 하고 나를 찾아주는 그 꼬마에게 주고 싶다. 장례식이나 제사 같은 것은 아예 소용없는 일,
거창한 장례를 치르고 있는데, 만약 내 이름으로 행해진다면 나를 위로하기는커녕 몹시 화나게 할 것이다. 평소의 식탁처럼 나는 간단 명료한 것을 따르고자 한다. 내게 무덤이라도 있게 된다면 그 차가운 빗돌 대신
모란을 심어 달라고 하겠지만,
이웃에게 짐이 될 것이므로 그것은 내가 벗어버린 헌옷이니까, 물론 옮기기 편리하고 이웃에게 방해되지 않을 곳이라면 아무데서나 다비(茶毘 화장)해도 무방하다. 사리 같은 걸 남겨 이웃을 귀찮게 하는 일을 나는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
싶은 곳이 있다.
의자의 위치만 옮겨 놓으면 하루에도 해지는 광경을 몇 번이고 볼 수 있다는 아주 조그만 그런 별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안 왕자는 지금쯤 장미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을까.
그런 나라에는 귀찮은 입국사증 같은 것도 필요 없을 것이므로 한번 가보고 싶다.
나는 이 나라를 버릴 수 없다.
다시 출가 수행자가 되어 금생에 못 다한 일들을 하고 싶다. |
1954년에 승려 효봉의 제자로 출가하였고 1970년대 후반에 송광사 뒷산에 손수 불일암을 지어 살았다.
2010년 3월 11일에 서울 성북구 성북2동에 위치한 길상사에서 폐암으로 인해 향년 78세로 사망(입적)하였다.
생애
1932년 10월 8일에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는 목포시에서 지냈다. 목포상업고등학교(현 전남제일고등학교)를 거쳐 전남대학교 상대에 진학했다. 그는 당시에 일어난 한국 전쟁을 겪으며 인간에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대학교 3학년때인 1954년에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오대산으로 떠나기로 했던 그는 눈길로 인해 차가 막혀 당시 서울 안국동에 있던 효봉 스님을 만나게 된다. 효봉 스님과 대화를 나눈 그는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고 행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바로 다음 해에 사미계를 받은 후 지리산 쌍계사에서 정진했다. 1959년 3월에는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으며, 1959년 4월에는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명봉 스님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업했다.
종교간 화합
1997년 12월 14일에 서울 성북동의 길상사 개원법회에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하여 축하해 주자, 이에 대한 답례로 1998년 2월 24일에 명동 성당을 방문하여 특별 강연을 가져 종교간의 화합을 보여주었다.[2]
대표 저서
무소유, 영혼의 모음, 서 있는 사람들, 말과 침묵, 산방한담, 텅 빈 충만, 물 소리 바람 소리, 버리고 떠나기, 인도 기행,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그물에 걸지 않는 바람처럼, 산에는 꽃이 피네, 오두막 편지,